흐르지 않는 강

193 · 서주, 아버님의 수레

삼국지 IF · 1~3장

선택은 이 기기에 기억됩니다.

제1장

아버님의 수레

193년 가을 ~ 194년 봄 · 효라는 이름으로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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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년 가을, 서주 땅을 지나던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당했다. 정확히 누가 왜 시켰는지는 사서마다 말이 갈린다. 하지만 군영의 병사들은 이미 그 일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린 병사, 그 이름을 허락해야 하는 사람, 그 이름 때문에 부름을 받은 사람, 셋의 겨울에서 시작한다.

시점 1 / 3진구병사 오장

I · 보리떡

견성 서쪽 병영의 아침은 죽 냄새로 시작됐다. 진구는 오(伍) 다섯 사람 몫을 뜨려고 국자를 쥐었다가, 솥 바닥에 눌어붙은 좁쌀부터 눈으로 쟀다. 일곱 홉이었다. 어제보다 한 홉이 모자랐다. 누가 삽으로 솥을 긁었다는 얘기였다.

덕만“오장님, 들었소? 서주 쪽에서 큰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거.”

진구“밥부터 먹어. 식는다.”

덕만“아니 들어 보시라니까. 주공 아버님이오. 수레가 열 대 넘게 가는데, 도겸 밑에 장개란 도위가 재물에 눈이 뒤집혀서…”

진구는 대꾸 대신 손가락 마디를 하나 꺾었다. 딱 소리가 났다. 덕만이 말을 멈추고 눈치를 봤지만 진구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뜨기 전에 숟가락을 두 번 세워 상을 톡톡 쳤다. 어머니가 하던 버릇이 그대로 옮아 온 것이었다.

막쇠“재물 때문이 아니란 말도 있수다. 도겸이 시킨 거라고.”

덕만“그러니 가서 갚아야지. 다들 대효도(大孝屠)라 하던데, 우리 주공이 효자시라서. 큰 효도 한번 하러 가자 그 소리요.”

그 말에 몇이 웃었다. 진구는 웃지 않았다. 도(屠) 자는 어디서 본 글자 같았는데, 한참 만에야 푸줏간 기둥에 붙은 것이었다고 떠올렸다. 고기 잡는 집 앞에 걸린 글자였다.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 문지기가 진구를 불렀다. 문 밖에 노파가 와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목책 밖 길가에서 보퉁이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동군 집에서 이십 리를 걸어왔을 사람이 숨도 고르지 않고 서 있었다.

어머니“밥은 먹었냐.”

진구“먹었습니다. 어머니, 여기 오시면 안 돼요. 병영에 아낙이 들어오면…”

어머니“안 들어간다. 여기서 준다. 보리떡 쪘다. 너 혼자 먹지 말고 네 오 사람이랑 나눠 먹어라.”

보퉁이를 받으니 아직 따뜻했다. 어머니는 아들 얼굴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소매로 진구의 턱을 한 번 닦았다. 죽 국물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주공 아버님 일은 들었다. 안됐지. 근데 진구야, 그 도겸 어른이 사람을 시켜서 그랬단 말이 맞냐?”

진구“저는 모릅니다. 위에서 하는 일이라서요.”

어머니“내가 팽성 사람이잖니. 그 어른 욕하는 사람은 못 봤다. 흉년 들면 곡식 푸는 어른이라고들 했어. 시킬 사람이 아니라던데.”

진구“…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모르지, 너는 늘 모르지. 대답 미루는 건 네 아버지를 닮았다. 서주로 가는 거냐?”

진구는 보퉁이 끈을 만지작거렸다. 군령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진구“견성에서 보급 지키는 일입니다.”

어머니“그래, 그러면 됐다. 신 다 닳았더라. 삼아 놨으니 사흘 뒤 새벽에 가져오마. 그때 보자.”

어머니는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길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등이 예전보다 굽어 있었고 걸음은 올 때보다 느렸다. 진구는 문 기둥에 기대서 그 모습이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보리떡은 열 개였다. 오 사람이 둘씩 먹으면 딱 맞았다. 어머니는 이런 셈을 틀린 적이 없었다.

II · 사흘 뒤 새벽

저녁 어스름에 백부장이 오장들을 불러 모았다. 횃불 아래 마당에 모인 열두 명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백부장이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백부장“사흘 뒤 새벽에 출정한다. 서주다. 오장은 오 사람 점고하고 짚신 새로 갈아 신겨라. 군령은 내일모레 따로 내려온다.”

덕만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서주면 팽성이 코앞이었다. 진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조카, 그러니까 외사촌 전보 형네는 팽성 동문 안쪽에 살았다. 식구가 여덟, 입이 여덟이면 하루 두 되. 보리가 올해 열두 섬쯤 났다고 했던가.

막사에 누워서도 그 셈이 멈추지 않았다. 열두 섬을 여덟이 먹으면 일 년 가고도 남았다. 그 여덟이 어디에 있을지는 셈에 들어가지 않았다. 진구는 그걸 깨닫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옆자리에서 막쇠가 코를 골았다. 진구는 입속으로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를 굴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사수 물가에 솥을 걸자 오는 손님 먼저 먹이자. 노래는 그 두 줄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그걸 밥 짓는 내내 되풀이했다. 그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소리가 새지 않게 이를 물었다. 막사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발치 짚 위에서 똑, 똑 소리를 냈다. 코 고는 소리와 물방울 소리가 엇박자라, 진구는 어느 쪽에 맞춰야 할지 몰라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팽성에서는 모두 아는 노래라고 했다. 어머니는 빨래할 때도, 아이 재울 때도 그 두 줄을 불렀다. 진구가 아는 것도 그 두 줄뿐이었다. 그 뒤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노래란 원래 그런 줄 알았다.

사흘 뒤 새벽이면 어머니가 짚신을 들고 문 앞에 올 것이다. 그때 말하면 한 번에 다 말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견성 보급이라는 말을 믿은 채 오늘 밤을 지낼 것이다. 진구는 손가락 마디를 꺾으려다가 멈췄다.

진구의 선택

III · 문에 걸린 신

출정 날 새벽, 진구는 해도 뜨기 전에 오 사람을 깨웠다. 평소보다 한 식경 이른 시각이었다. 덕만이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덕만“오장님, 오늘은 어째 서두르십니까. 어머님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소?”

진구“짚신은 필요 없다. 내가 사서 신었어. 줄 서.”

덕만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 더 보탰을 사람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그것이 진구에게는 더 이상하게 보였다. 오 사람은 어둠 속에서 창을 들고 줄을 섰다. 진구는 그 줄 맨 앞에 서서 문을 지나갔다. 목책 문 기둥에 짚신 한 짝이 못에 걸려 있었다. 새것이었다. 짚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문 너머 길 끝에서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오는데도 누구 목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침마다 부엌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던 그 소리와 같았다.

어머니“진구야! 진구야, 신 걸어 놨다!”

어머니가 걷는 소리가 아니라 뛰는 소리였다. 숨이 목에 걸려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덕만이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진구“앞 봐.”

덕만“오장님, 저기 어머님이…”

진구“앞 보라고 했다.”

진구는 걸음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어머니의 목소리가 뒤에서 멀어졌다. 열 걸음쯤에서 “진구야” 소리가 한 번 더 들렸고 서른 걸음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어머니 얼굴 말고 다른 것도 같이 보일 것 같았다.

덕만이 신을 가지러 가겠다는 듯 몸을 뒤로 틀었다. 진구는 그 손목을 잡았다.

진구“놔둬.”

덕만“주인이 있는 건데…”

진구“그러니까 놔두라고.”

신은 새벽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십 리쯤 갔을 때 진구의 왼쪽 짚신 끈이 끊어졌다. 어머니가 삼아 놓은 새 신이 걸려 있던 자리가 눈앞에 선했다. 그는 길가 풀을 뜯어 끈을 대신 묶었다. 풀로 묶은 신은 걸을 때마다 발목을 스쳤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소금 행상에게 외사촌 앞으로 서한을 맡기고, 어머니께는 서주로 간다고 말한다. 행상의 걸음과 군이 도착하는 날 중 어느 쪽이 먼저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III · 서한

사흘 뒤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진구는 그날 저녁 외박 허락을 받아 동군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짚신을 삼던 손을 멈추고 아들 얼굴을 보았다. 불빛 아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서주 가는구나.”

진구“…예.”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짚 다발을 한 번 털었다.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진구는 어머니의 침묵을 곡식 가마를 지는 것처럼 견뎠다.

어머니“전보 형네는 동문 안쪽이다. 우물 두 개가 있는 집 뒤. 형은 글을 못 읽는다. 옆집 훈장한테 읽어 달라 해야 돼.”

진구“글은 짧게 쓰겠습니다. 성을 떠나라고요. 이유는 적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이유는 적어라. 안 적으면 안 믿는다. 형은 의심 많은 사람이야.”

진구“이유를 적으면 서한이 잡혔을 때…”

어머니“그럼 이유는 말고, 우리 노래를 적어라. 형은 그걸 알아본다. ‘솥을 걸자’ 말고 그 뒷줄. 나가라는 소리를 하는 노래다.”

진구는 붓을 잡다 멈췄다. 뒷줄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진구는 어머니 입을 보며 한 글자씩 받아 적었다.

그날 밤 장터에서 팽성으로 소금을 팔러 간다는 행상 한 사람을 구했다. 행상은 서한을 받아 품에 넣고 값을 불렀다. 진구는 가진 돈의 절반을 내밀었다.

행상“이게 뭐요. 편지 하나에 이렇게나?”

진구“동문 안쪽 우물 두 개 있는 집 뒤. 전보라는 사람. 직접 주십시오.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마시고요.”

행상“가면 읽어는 주는 거요? 그 사람, 글 모른다면서.”

진구“옆집 훈장한테 읽어 달라 하라고 하십시오.”

행상은 서한이 들어간 품을 한 번 두드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이 느렸다. 팽성까지 보름은 걸릴 듯한 걸음이었다. 진구는 군이 팽성에 닿는 날을 헤아려 보았다. 열흘이었다. 닷새 모자랐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벽에 병영을 나선다. 문 기둥에는 새로 삼은 짚신 한 짝이 걸려 있고, 십 리도 못 가 신 끈이 끊어진다.

시점 2 / 3조조연주목

IV · 바퀴 한 짝

비는 사흘 만에 그쳤다. 조조는 막사에 앉아 구석에 기대어 놓은 바퀴 한 짝을 보고 있었다. 수레에서 떼어 온 것이었다.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살 사이에 풀 한 줄기가 박혀 있었다. 가솔 중에 살아서 돌아온 노복이 그걸 지고 왔다.

노복“주공, 소인은 수레 맨 뒤에서 짐을 끌었습니다. 앞에서 사람 소리가 났는데, 처음에는 또 비 때문에 수레가 멈췄나 했습니다.”

조조“그래. 그 뒤는.”

노복“나리께서… 덕 나리께서 먼저 내려가셨고요. 소인은 짐 밑으로 기어들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소인이 본 건 그게 전부입니다.”

조조“됐다. 하나만 묻자. 아버님 수레 휘장은 무슨 색이었나.”

노복은 대답이 막혔다. 왜 그걸 묻는지 몰라서 눈을 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노복“푸른색이었습니다. 한쪽 귀퉁이가 해졌고요.”

조조“푸른색이었군. 내가 지난봄에 새로 해 드리겠다고 했는데 아버님이 아깝다고 하셨지. 해진 데 기워서 쓰겠다고. 그래, 가 봐라. 밥 먹고 자거라.”

노복이 물러났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탁, 탁. 소리가 막사 안에서 유난히 크게 났다. 아버지의 시신은 비 때문에 닷새 뒤에야 닿는다고 했다. 조조는 아버지의 마지막 서신을 떠올렸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연주로 오겠다고, 길이 험하니 마중은 보내지 말라고 쓴 서신이었다. 마중을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보내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었다. 그 일을 곱씹을 시간은 군에 없었다. 군은 곱씹는 사이에도 밥을 먹었다.

막사 휘장이 걷혔다. 순욱이 들어서서 두 번 절하고 앉았다. 뒤따라 정욱이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조조는 순욱의 눈이 구석의 갑옷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갑옷 한 벌이 걸려 있었는데 가슴판의 가죽 끈이 새로 갈려 있었다. 주인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손질한 흔적이었다.

조조“문약이 오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은 아니겠군. 중덕은 군량 얘기를 들고 왔고. 둘 다 밥값은 하는 사람들이야.”

정욱“주공이 웃으시니 소신이 더 무섭습니다.”

조조“웃어야 쓰지 않나. 울면 군이 어디로 가겠나.”

그 말을 하는 조조의 목소리가 끝에서 내려갔다. 순욱이 눈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촛불 심지가 한 번 튀었다. 목소리가 방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조조는 고치지 않았다.

V · 한 줄

서기가 올린 군령 초안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문장은 단정했다. 도겸의 죄를 묻고 장개의 목을 구하며 서주 땅으로 군을 낸다는 대목까지 조조의 뜻과 같았다. 마지막 줄만 달랐다. 서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덧붙인 듯한 필체였다. 서주에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남기지 말 것.

조조“이 줄은 누가 넣었나.”

정욱“소신이 아닙니다. 하후 장군 막하에서 온 말을 서기가 받아 적은 것 같습니다. 군의 원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조조“그래서 군이 어디까지 가겠다고 하던가.”

정욱“화와 비를 지나 팽성입니다. 군량은 한 달치입니다. 그 안에 끝내면 되고, 못 끝내면 서주가 군량이 됩니다.”

순욱이 무릎 위의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던 짓이었다.

순욱“주공, 소신이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서주 사람 모두가 장개는 아닙니다.”

조조“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나.”

순욱“아닙니다. 아시는 줄 압니다. 다만 군 아래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조조“하후 장군 막하라 했나. 그 말을 처음 한 사람 이름은.”

정욱“알아 두시면 벌을 내리셔야 하니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병사 하나가 한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올라온 것이라 합니다.”

조조“병사 하나라…”

조조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는 말이 어느새 자기 붓끝에 올라와 앉아 있었다. 촛불이 한 번 기울었다가 섰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말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조조는 붓을 들었다. 먹이 이미 갈려 있었다. 붓끝이 줄 위에 머물렀다. 막사 밖에서 말이 한 번 울고 병사들이 교대하는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누군가 기침을 했고 그 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조조“문약. 내 아버님은 평생 남의 땅을 떠돌다 가셨다. 나는 그분께 집 한 채를 못 사 드렸다. 이게 효냐.”

순욱“…주공.”

조조“답은 두게. 중덕, 내가 이 줄을 두면 군은 몇 날 동안 움직이나.”

정욱“이 줄을 두면 병사들이 닷새 안에 팽성에 닿습니다. 지우면 보름은 걸립니다. 노략을 못 하면 뒤따르는 군량 수레에 발을 맞춰야 하니까요.”

조조는 붓끝을 먹에 한 번 더 적셨다. 먹물이 붓에서 뚝 떨어져 군령 가장자리에 점을 찍었다. 순욱이 숨을 멈췄다. 정욱은 군량을 헤아리는 사람 특유의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조는 탁자를 두 번 쳤다. 탁, 탁. 그러고는 붓을 그 줄 위에 가져갔다.

조조의 선택

VI · 먹이 번진 자리

붓이 줄 위에 놓였다. 닿는 순간 먹이 종이에 번졌다. 글자 몇 개가 뭉개져서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조조는 그 위에 인장을 찍었다. 붉은 인주가 번진 먹 위로 올라앉았다.

순욱은 군령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뒷걸음질로 휘장 쪽으로 물러났다. 휘장이 흔들렸다.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오래 이어졌다.

조조“문약이 감기가 든 모양이군.”

정욱“추운 날씨입니다.”

조조“중덕. 이걸 내일 새벽까지 필사해서 각 진에 보내게. 백 부는 만들어야 해.”

정욱“백 부면 서기들이 밤을 새웁니다. 마지막 줄은 이대로 옮깁니까?”

조조“먹이 번진 대로 옮기라고 하게. 어차피 읽을 필요 없는 줄이야. 한 번 들으면 다 아는 줄이니까.”

정욱이 군령을 말아 쥐었다. 나가면서 한마디만 남겼다.

정욱“닭과 개가 없어지면 군량 계산이 쉬워집니다. ”

조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막사에서 구석의 바퀴를 한참 보았다. 풀 한 줄기는 아직 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잡아 빼 볼까 하다가 손을 거뒀다.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소리가 작았다.

새벽이 되기 전에 서기들이 필사를 마쳤다. 서기 하나가 졸다가 붓을 떨어뜨리자 정욱이 말없이 새 붓을 쥐여 주었다. 백 부의 종이가 말 등에 실려 진영마다 흩어졌다. 그 가운데 한 부가 견성 서쪽 병영에 닿을 것이었다. 거기서 오장 하나가 밥을 짓다 말고 그걸 받아 읽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그 줄을 지운다. 지운 자리에 글자가 희미하게 비쳐 보이고, 경비병 하나가 대장이 약해졌다고 수군거린다.

VI · 지워진 줄

조조는 줄 위에 붓을 그었다. 가로로 한 번, 한 번 더. 글자가 먹 밑으로 가라앉았다. 지운 뒤에도 읽으려면 읽을 수 있을 만큼 얇은 줄이었다.

순욱의 어깨가 처음으로 풀렸다. 정욱은 풀리지 않았다.

정욱“주공, 이렇게 하시면 군이 어찌 듣겠습니까. 병사들은 사흘 굶고도 효를 위해 간다는 말에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로 사흘은 걷습니다. 나흘째부터는 손에 쥐는 게 있어야 걷습니다.”

조조“얻는 게 없다니, 장개 목이 있잖은가.”

정욱“그건 한 사람 몫입니다. 한 사람 목으로 군 전체가 먹지 못합니다.”

조조“칼을 안 댄 땅은 이긴 뒤에 내 땅이 되네. 중덕, 다스릴 땅이 필요해서 하는 소리야.”

정욱“…그럼 그렇게 군령에 쓰시지요. 병사들은 그걸 이해하기 전에 먼저 굶습니다.”

순욱“문서에 쓰는 것과 병사들이 듣는 것은 다릅니다. 소신이 군 안에서 말을 돌려 보겠습니다.”

조조“그래 주게, 문약. 말은 자네가 제일 잘 돌리니까.”

조조는 웃으려다가 말았다. 정욱은 군령을 말아 쥐고 나갔고, 순욱은 절을 하고 뒤따랐다. 막사에 혼자 남은 조조는 지운 줄을 한참 내려다봤다. 줄 아래 글자가 비쳐 보였다. 닭, 개. 그는 그 두 글자를 손끝으로 눌러 봤다. 종이가 얇아서 손가락에 먹이 묻어났다.

막사 밖에서 경비병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휘장 사이로 넘어왔다. 숨죽이려는 목소리가 오히려 또렷했다.

경비병“줄 하나 지웠다더라. 마지막 줄을.”

다른 경비병“무슨 줄인데?”

경비병“몰라, 서기가 그러는데 닭하고 개 어쩌고 하는 거였대. 아무튼 대장이 약해졌다는 소문이 벌써 돈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소리가 막사 밖까지 넘어갔는지 경비병들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먹 묻은 손가락을 소매에 닦았다. 소매에 검은 자국이 남았다. 오늘 하루는 그 자국을 가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그 줄을 지우지 않는다. 먹이 번진 군령 백 부가 그대로 나가고, 순욱은 문밖에서 말없이 기침만 한다.

시점 3 / 3유비평원상

VII · 도겸의 편지

평원성 관아 마당에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처마 끝 고드름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유비는 한 장짜리 서찰을 두 손으로 쥐고 서 있었다. 종이가 얇아서 눈 위로 햇빛이 비치면 뒷면의 글씨가 비쳐 보였다. 편지는 짧았다.

서주목 도겸, 평원상 현덕께 고합니다. 조조의 군이 서주에 듭니다. 곧 팽성에 닿을 것입니다. 구원을 청합니다. 병이 부족하면 단양에서 온 병 사천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장비“사천이라면 큰 거 아닙니까, 형님. 도겸 영감이 이 꼴이면 지금 사정이 어지간히 급한 겁니다.”

유비“익덕아, 소리가 크다. 사자가 듣는다.”

장비“듣거나 말거나 우리가 가야죠. 가면 사천이오.”

관우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서쪽을 보고 있었다. 서주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유비는 그걸 알았다. 관우가 말없이 서쪽을 볼 때는 어디서 사람이 오고 있을 때였다.

유비“운장, 어찌 보는가.”

관우“형님의 판단이 곧 제 판단입니다.”

유비“그 말은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같은데.”

관우“…가면 평원이 빕니다. 공손 장군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손찬이 보낸 사자는 마당 한쪽에서 두 손을 소매에 넣고 서 있었다. 사자는 눈치를 봤지만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이 오는 날에도 땀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소매 끝으로 이마를 닦았다. 녹은 눈이 그의 턱 끝에서 한 방울 떨어졌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사자“공손 장군께서는 평원상이 알아서 하시라 하셨습니다. 다만 군을 빼시려거든 아랫사람 이름을 모두 적어 올리라 하셨습니다. 누가 가고 누가 남는지요.”

유비“이름을 적어 올리라…”

유비는 그 말을 입속으로 되풀이했다. 이름을 적어 올리라는 말이 병을 적어 올리라는 말보다 먼저 귀에 걸렸다. 병은 몇 천이면 숫자이지만 이름은 한 사람마다 얼굴이 있었다. 평원성 문지기의 이름은 대성이었다. 그 옆자리는 말이 없는 아이로 이름은 재진이었다. 유비는 그들 이름을 한 번씩 입속으로 불렀다.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녹아 떨어졌다. 한 방울이 눈에 박히는 소리가 마당 가득 들릴 만큼 사방이 조용했다. 장비는 입을 열려다가 관우의 눈빛에 걸려 도로 닫았다. 사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유비“사자 어른. 오늘 밤 하루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내일 아침 답하겠습니다.”

사자는 허리를 숙였다. 눈이 그의 어깨 위로 쌓였다.

VIII · 짚신

밤이 되자 관아 뒤채에 불이 들어왔다. 유비는 화로 곁에 앉아 짚 한 다발을 풀어 헤쳤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릴 적 탁현 시장에서 돗자리와 짚신을 짜서 팔던 손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생각이 복잡해지면 짚을 잡았다. 끈을 꼬고 신코를 만들고 바닥을 엮었다.

장비는 방 한쪽에서 코를 골았고 관우는 문 옆에 앉아 칼을 닦았다. 유비는 신 한 짝을 다 엮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유비“운장. 사천이라는 병은 어디서 올까.”

관우“단양입니다. 도겸의 사람들이 아닌 병입니다.”

유비“도겸이 그걸 내게 내준다는 건, 이 일이 끝나도 내가 그에게 빚졌다는 소리지.”

관우“예.”

유비“빚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제때 못 가서 팽성이 무너지면, 그건 빚이 아니라 짐이 되겠지.”

관우“…”

유비“아니야, 말을 하다 보니 그렇다는 거야. 접어 두게.”

관우는 칼을 닦던 손을 멈추었다. 칼날에 화로 불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관우“형님.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 가면 공손 장군 눈 밖에 나고, 늦게 가면 도겸 눈 밖에 납니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유비는 웃었다. 짚신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끈을 꼬다 말고 한동안 손이 멈췄다. 방 한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뚝 끊겼다. 장비가 눈을 반쯤 뜬 채 몸을 일으켰다.

장비“형님, 아직도 신 삼고 계십니까. 서주는 내일이라도 불이 날 판인데.”

유비“불이 나는 판이니 신이 필요하지. 걸어가든 뛰어가든 맨발로는 못 가.”

장비“그 말씀은 가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유비“아직 모르겠다. 자네는 자게.”

장비는 투덜거리며 도로 누웠다. 얼마 안 가 다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유비는 그 소리를 듣고 조금 안심했다. 이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잠은 잔다.

유비“글쎄, 둘 다 무겁네. 그래서 이러고 앉아서 신이나 삼는 거 아닌가.”

관우“…농담이십니까.”

유비“반쯤은.”

아침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세 시진이 남아 있었다. 유비는 신을 내려놓고 서찰을 다시 펼쳤다. 서찰 끝의 사천이라는 글자 위로 불빛이 얼룩졌다. 그는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문밖에서는 눈 쌓인 마당을 가로지르는 야경꾼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한 걸음마다 눈이 뽀드득 울었다. 유비는 그 소리를 세다가 열에서 그만두었다.

유비의 선택

IX · 새벽 성문

새벽 인시에 평원성 문이 열렸다. 눈은 그쳤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중이었다. 유비는 성문 앞 말 위에서 군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앞서 나가는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모두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장비“형님, 이렇게 빨리 정하실 줄 몰랐습니다. 어젯밤엔 영 안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유비“가기로 정한 건 어제 낮이다, 익덕아. 어젯밤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만 생각했어.”

장비“그게 그거 아닙니까.”

유비“다르다. 눈길에 짚신 바닥이 얼마나 버틸지 셈해 봤다.”

장비는 알아듣지 못해 투덜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해의 군이 같은 길로 나란히 나서고 있었다. 숫자로는 사천이 조금 넘었다. 눈 위를 걷는 짚신 소리가 한꺼번에 사각사각 났다. 그 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는 묻혔다.

성문을 지나다가 유비는 말을 세웠다. 문지기가 창을 세우고 서 있었다.

유비“대성이.”

대성“예, 상공.”

유비“오늘은 평원이 빈다. 자네가 문을 맡아 주게. 열쇠를 잘 쥐고 있게나.”

대성“…예. 맡겠습니다.”

대성의 눈이 커졌다. 평원상이 문지기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비는 말 배를 차고 성문을 지났다. 성벽 위에서 노인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비도 손을 들어 보였다.

반나절을 걸어 어느 언덕에 올랐을 때 맞은편 길로 짐을 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솥을 진 아낙, 아이를 업은 노인, 소 한 마리를 끌고 가는 사내였다. 관우가 말을 가까이 붙이고 낮게 말했다.

관우“형님.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입니다.”

유비“알고 있다.”

그들은 군이 지나가는 동안 길가에 비켜 서서 눈을 내리깔았다. 유비는 그 사람들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앞서가는 병사들의 짚신 끈을 하나하나 보았다. 풀린 것이 있으면 이름을 불러 매게 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하룻밤을 더 머문다. 파발이 달려와 팽성이 어젯밤 무너졌다고 전하는데, 불을 살리러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IX · 하룻밤 더

유비는 군을 냈다. 다만 새벽이 아니라 해가 중천에 오른 뒤였다. 전해의 군이 먼저 앞서 나갔고, 유비는 그 뒤를 따랐다. 진군은 하루 이십 리를 넘지 않았다. 해가 지기도 전에 병영을 쳤다.

장비“형님, 아직 해가 남았습니다. 한 시진은 더 갑니다.”

유비“익덕아. 병사들 신 좀 봐라. 오늘 눈길이었다. 쉬어야 내일 걷는다.”

장비“서주 사람들은 지금도 죽어 나갑니다.”

유비“그래서 하루만 더 본다. 전해가 먼저 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 뒤에 가야 한다.”

장비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숨소리가 거칠었다. 관우가 불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병사들은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국을 마시고 있었다. 소리 없이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비는 불에서 떨어져 병영 가장자리에 섰다. 남쪽 하늘이 어두웠다. 그는 남쪽 길까지 남은 날수를 손가락으로 다시 셌다.

새벽 인시가 되기 전에 길 위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 필이었다. 병영 보초가 창을 세우고 외쳤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린 사람은 도겸 쪽 파발이었다. 입술이 터져 있었고 정강이부터 허벅지까지 진흙이 튀어 있었다.

파발“평원상께 아룁니다. 팽성이 무너졌습니다.”

유비“언제 일인가.”

파발“밤사이입니다. 성이 아니라 사람이, 사수 가에서… 소인은 더 보지 못했습니다. 말을 타고 도망 나왔습니다.”

관우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장비는 입을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유비는 파발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파발의 어깨뼈가 손에 닿았다. 가볍고 떨렸다.

유비“이름이 뭔가.”

파발“…예?”

유비“이름 말이네. 자네 이름.”

파발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고삐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파발“소인은 이름이… 서문입니다.”

유비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되풀이했다. 하루 늦었다는 말은 병영 안의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유비는 서문을 불가에 앉히고 관우에게 말 먹이를 챙기라 일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새벽에 성문을 나선다. 문지기 이름을 불러 인사하고, 길가에는 피난민 행렬이 이어진다.

제2장 · 루트 r1

사수가 흐르지 않던 날

194년 봄 ~ 가을 · 사서 그대로의 도륙

아래로 ↓

조조의 군령은 지워지지 않았다. 닭 한 마리 남기지 마라, 그 한 줄이 군영을 지나 서주 땅으로 들어갔고 팽성 앞 사수는 봄 내내 제 길을 잃었다. 칼을 든 오장, 성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늙은 서주목, 눈을 맞추지 못한 책사가 같은 강가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듣는다.

시점 1 / 3진구오장

I · 동문

팽성 동문이 열린 것은 인시가 지난 뒤였다. 문을 연 쪽은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였다. 진구의 오는 맨 앞줄에 섰다. 선봉이라는 말이 오장들에게 내려온 것은 어젯밤이었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새벽이 되어서야 몸으로 알았다. 가장 먼저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본다는 뜻이었다.

군령은 아침 점고 때 읽혔다. 백부장이 목간을 펴 들고 더듬더듬 읽었다. 글을 읽는 목소리가 떨렸는데 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부장“주공 말씀이다. 서주 땅에서는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남기지 마라. 이상이다.”

덕만“이상이오? 그게 다요?”

백부장“그게 다다. 더 읽을 게 없어.”

덕만“아니, 닭하고 개만 말입니까. 사람은…”

백부장“닭하고 개 말고 뭘 더 써 줘야 알아듣겠느냐.”

덕만은 입을 닫았다. 열두 오장 중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진구는 손가락 마디를 꺾으려다가 말았다. 이상하게 소리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숟가락 세우던 버릇대로 창 자루를 두 번 세워 땅을 톡톡 쳤다. 들고 있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창이었는데, 창 자루가 땅에 닿자 똑같은 소리가 났다. 두 번이었다.

막쇠가 뒤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오장의 귀에만 들릴 만한 소리였다.

막쇠“오장님, 저 안에 솥은 몇 개나 있을까요. 밥때가 지났는데.”

진구“조용히 해.”

덕만“오장님, 저도 배가 고픕니다. 근데 이상하게 먹고 싶지가 않소.”

진구“둘 다 조용히 해라.”

막쇠“배가 고파서 그러지요. 어제 죽이 일곱 홉이었잖소.”

진구“알아. 닥치라고.”

막쇠“닥치겠소. 근데 오장님, 안에 사람이 있으면 어쩝니까.”

진구“사람 있는 데는 우리 앞에 간 놈들이 이미 지나갔어.”

막쇠“그럼 우린 뭘 하러 갑니까.”

진구“남은 걸 치우러 간다.”

막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팽성 문턱을 넘자 먼저 코가 열렸다. 불 냄새가 아니었다. 솥에서 막 끓어 오르는 누룩 냄새 같은 것이 골목 안쪽에서 풍겼다. 아침을 짓던 집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진구는 그 냄새가 어머니 부엌에서 나던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가 생각을 거두었다. 거둬지지가 않아서 한 번 더 거뒀다.

앞쪽 골목에서 누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늙은 사내였다. 속옷 바람에 허리끈도 매지 않고 나와서 눈을 비비며 병사들을 보았다. 사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렸다. 진구가 그 입 모양을 읽으려는 사이에 뒤에서 호각이 길게 울렸다.

백부장“진행! 오장은 앞으로!”

진구“오 앞으로! 열 맞춰라!”

덕만“오장님, 앞에 사람이…”

진구“보지 마. 앞만 봐.”

진구는 앞으로 나갔다. 걸음을 떼는 동안 귀가 한쪽부터 먹먹해졌다. 호각 소리도 쇠 소리도 멀어졌다. 소리가 사라지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번엔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대신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칼을 쥔 오른손만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칼자루가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이 아니라 손이 칼자루에서 자라난 것 같았다.

II · 사수

해가 높이 떴을 때 오 사람은 사수 둑으로 몰려 내려갔다. 위에서 시킨 것은 둑 아래 길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진구는 그 말을 들은 대로 옮기고 오 사람을 한 줄로 세웠다. 덕만은 창대를 잡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고 막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둘 다 어딘가를 보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곳이었다.

강물은 아침에 보았을 때와 달랐다. 흐르지 않았다. 물이 둑 가장자리에서 한 겹 두 겹 부풀어 있다가 그냥 거기 서 있었다. 갈대 사이로 이불 자락이 떠 있었고 그 옆에 수레바퀴가 가라앉다 만 채 걸려 있었다. 바퀴살 사이에 푸른 천이 끼어 있었다. 진구는 그것이 혼례 때 쓰는 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만 생각했다.

세기를 시작한 것은 정오쯤이었다. 백부장이 목간에 눈금을 긋는 오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구가 맡았다. 하나, 둘, 셋. 다섯에서 한 줄을 긋고 열에서 줄을 바꿨다. 농사철 보리 가마를 세던 손놀림이었다. 칸이 다 차면 새 목간을 받았다. 서른 칸쯤부터는 셀 것이 손보다 빨리 늘었고, 그 뒤로는 도중에 놓쳤다. 놓친 만큼은 대충 셈해서 채웠다. 틀린 줄은 알았다. 그래도 목간에는 칸이 비어 있으면 안 되었다.

백부장“오장, 몇이냐.”

진구“셈이 안 맞습니다. 서른 칸 넘으면 놓칩니다.”

백부장“놓친 건 채워라. 칸이 비면 내가 위에 뭐라고 보고하겠느냐.”

진구“…예.”

점심은 식은 보리밥이었다. 막쇠가 물에 말아 먹으려다가 강 쪽을 보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덕만은 먹었다. 두 숟가락째에서 멈추고는 입에 문 채 가만히 있었다.

덕만“오장님, 맛이 안 나요.”

진구“먹어.”

덕만“밥인데 맛이 안 납니다. 소금 안 쳤소?”

진구“쳤어. 먹으라니까.”

진구도 한 숟갈 떴다. 씹었다. 삼켰다. 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식은 보리밥이 어떤 맛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에서는 모래 같은 것이 굴러다녔다. 어머니가 쪄 준 보리떡의 맛이 떠올랐다. 맛이 아니라 이름만 떠올랐다. 보리떡, 열 개. 그 이름이 혀 위에서 아무 맛도 내지 않았다.

해 질 무렵 이웃 오가 둑으로 올라와 자리를 바꿨다. 진구는 일어나다가 둑 위쪽 골목에 시선이 갔다. 우물이 두 개 있는 집이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한참 쳐다봤다. 문은 열려 있었고 마당에 짚신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진구는 그 신이 누구 것인지 떠올리려다가, 떠올려서 뭘 하겠느냐고 생각하고 눈을 돌렸다.

막쇠“오장님, 내일은 교대 없답니까.”

진구“모른다. 위에서 말해 줄 때까지 서 있어.”

막쇠“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진구“…서 있기만 하면 된다.”

저녁에 천막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었다. 손가락 마디를 꺾어 보려 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예 꺾이는 느낌이 없었다. 숟가락을 두 번 세우던 버릇도 낮부터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막쇠가 코를 골았다. 천막 밖 먼 데서 누가 한 사람의 이름을 천천히 부르고 있었다. 한 번 부르고 한참 쉬었다가 다시 불렀다. 부르는 쪽도 대답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구의 선택

III · 눈금

사흘째에 목간은 열두 개가 찼다. 진구는 그 열두 개를 백부장에게 넘겼다. 백부장은 받아서 훑어보지도 않고 수레에 던졌다. 숫자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진구“열두 개입니다. 칸은 다 채웠습니다.”

백부장“채웠으면 됐다. 다음.”

덕만은 말수가 줄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다가 밤에 천막에서 불쑥 입을 뗐다.

덕만“오장님, 둑 위 골목에 개가 한 마리 남았습디다.”

진구“봤나.”

덕만“봤소. 짖지도 않고 앉아 있습디다. 그놈은 어쩌라는 겁니까.”

진구“…몰라. 군령은 개도 남기지 말라 했다.”

덕만“그걸 누가 합니까.”

진구“내일 보자.”

덕만“오장님은 괜찮소?”

진구“뭐가.”

덕만“아니, 그냥.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서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요.”

진구“아무렇지도 않으면 좋은 거야. 자.”

덕만“오장님도 안 주무실 거면서.”

진구“자라니까.”

덕만“예. 자겠소. 근데 눈을 감으면 자꾸 세어집니다.”

진구“나도 그렇다.”

진구는 눈을 감았지만 자지 못했다. 어디선가 숫자를 세는 소리가 났는데 자기 목소리였다. 하나, 둘, 셋. 열에서 줄을 바꾸는 순간 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나왔다. 일어나 앉아 이마를 문질렀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칼자루에서 손을 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둑에 나갔을 때 아침 햇살이 막힌 물 위로 비껴 들었다. 물이 번들거렸다. 진구는 그 빛을 한참 보다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정확히는 신 한 짝이었다. 문 기둥에 걸린 새 신이 어디서 바래고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바로 생각을 접었다. 접으면서 손이 알아서 목간에 한 칸을 그었다. 눈금이 반듯하게 나왔다. 그는 반듯한 눈금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속이 철렁했다. 철렁한 것은 잠깐이었다.

점심 때 취사병이 국을 퍼 주었다. 막쇠가 받아 들고 맛을 보더니 처음으로 웃었다.

막쇠“오장님, 오늘은 짜네요. 간이 된 거 같소.”

진구“그러냐.”

막쇠“예. 어제는 맹물이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짭니다. 오장님은 안 짭니까.”

진구“…짜다.”

진구는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이 없었다. 짜다는 막쇠의 말이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국을 다 마셨다. 빈 그릇을 내려놓는데 손이 떨리지 않아서 이상했다. 떨려야 할 것 같았는데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둑 아래 흐르지 않는 물이 진구의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밤에 창을 놓고 우물 둘 집으로 올라가 처마 밑에서 도치라는 아이를 만난다. 물 한 바가지를 먹이고 손목을 잡아 동문 반대편 어둠으로 걸음을 돌린다.

III · 우물 둘

밤이 깊어서 진구는 천막을 나왔다. 덕만이 눈을 뜬 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구는 창은 놓고 칼만 찼다. 둑을 따라 올라가 우물이 두 개 있는 집 앞에서 멈췄다. 낮에 문이 열려 있던 집이었다. 지금도 열려 있었다.

마당에는 항아리가 뒤집혀 있었다. 짚신이 한 켤레씩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무도 줍지 않은 신이었다. 진구는 마당에 들어서서 부엌 쪽을 보았다. 불 꺼진 아궁이 위에 솥이 엎어져 있었고 그 옆에 누룩 바가지가 있었다. 아침에 맡은 냄새의 자리였다.

처마 밑에서 소리가 났다. 아주 작았다. 쥐가 아니었다. 진구는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아 처마 밑 어둠에 대고 낮게 말했다.

진구“나다. 병사다. 안 해친다.”

대답은 없었다. 진구는 한참 기다리다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이 이상했다.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게 갈라져 나왔다.

처마 밑에서 눈이 하나 반짝였다. 아이였다.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저고리 앞섶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고 맨발이었다. 아이는 진구의 칼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마른 풀잎처럼 갈라져 있었다.

진구“물 먹었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진구는 우물로 가서 두레박을 내렸다. 줄이 마른 소리를 냈다. 물을 길어 올렸지만 담을 그릇이 마땅치 않았다. 마당에 굴러다니는 박 바가지를 주워 와 물을 떠서 건넸다. 아이는 두 손으로 받아서 단숨에 마셨다. 반은 턱으로 흘렸다. 진구는 소매로 아이 턱을 한 번 닦아 주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던 손동작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였다.

아이“아저씨, 우리 큰아버지 못 봤소?”

진구“큰아버지가 누군데.”

아이“전보. 머리가 반은 희어요. 어제 아침에 문 앞에 서 계셨는데.”

진구는 바가지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늙은 사내가 떠올랐다. 속옷 바람에 허리끈도 없이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었다. 진구는 대답을 미뤘다. 아버지를 닮은 버릇이었다.

진구“…못 봤다.”

아이“정말이오? 아저씨가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니고?”

진구“정말이다. 따라와.”

아이“어디로 가오.”

진구“사람 없는 데로.”

아이는 그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아니면 믿는 척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진구“이름은.”

아이“도치요. 큰아버지가 도치라고 불렀소.”

진구“그래, 도치. 가자.”

진구는 일어나서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놀랄 만큼 가벼웠다. 둑 쪽을 한 번 보고, 동문 반대편 어둠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사흘째에 목간 열두 개의 칸을 채워 백부장에게 넘긴다. 눈금이 반듯하게 나오는 게 마음에 든다는 걸 깨닫고서야 속이 철렁하지만, 그 철렁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점 2 / 3도겸서주목

IV · 파발

담성 안방에서 도겸은 파발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발소리였다가 다음엔 문이 열리는 소리였고, 마지막엔 숨이 가쁜 사내가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도겸은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도겸“팽성이냐.”

파발“예, 주공. 팽성이…”

도겸“무너졌느냐.”

파발“성이 무너진 게 아니옵고…”

도상이 곁에서 약사발을 든 채 얼어 있었다. 파발은 숨을 고르려 했지만 목이 잠겨서 말이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더듬더듬 말한 것은 숫자였다. 숫자가 너무 커서 도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만이라는 말이 몇 번 나왔고, 사수가 흐르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도겸“몇 만이라 했느냐.”

파발“소인이 센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옵니다. 남녀노소 합쳐 수만이라 하옵니다.”

도겸“수만이면 서주 사람 열에 하나는 되겠구나.”

도상“아버님, 더 들으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도겸“몸은 이미 해롭다. 마저 말해라.”

도겸은 그제야 눈을 떴다. 천장 서까래 하나를 한참 보았다. 거기 붙은 얼룩 모양이 낯익었다. 이 성에 처음 들던 해에 비가 새서 생긴 자국이었다. 그때 수리하려다가 말았다. 그 일이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도겸“누가 있었느냐. 성 안에.”

파발“조표 장군이 막아섰다 하옵고, 백성은…”

도겸“백성 말고. 내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도상“아버님.”

도겸“사수가 흐르지 않는다고 했지. 물이 어디로 간 게냐.”

파발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겸은 대답을 받으려던 게 아니었다. 입에서 그냥 나온 말이었다. 열 번쯤 기침을 하고 나서야 손이 이불 위에 놓였다. 약사발은 식어 있었다. 도상이 새로 달이겠다고 일어서자 도겸은 고개를 저었다.

도겸“됐다. 그건 이제 약이 아니다.”

도상“드셔야 합니다.”

도겸“내가 나아서 뭘 하느냐. 아들아. 성문은 닫았느냐.”

도상“닫았습니다.”

도겸“누가 닫으라 했느냐.”

도상“조표 장군이 먼저 청했고, 제가 허락했습니다.”

도겸“…네가 허락했구나.”

도겸“…열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상은 입을 다물었다. 미축이 문 앞에 서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으나 끝내 들어오지 못했다. 도겸은 그를 불렀다.

도겸“자중. 사람을 평원으로 보내게. 유현덕에게.”

미축“이미 보냈사옵니다. 전해 장군 쪽 군과 함께 올 것이라 하였고…”

도겸“그 군이 닿을 때쯤이면 내가 있겠느냐. 아니, 이 성이 있겠느냐.”

미축은 평원에서 온 답신을 소매에서 꺼냈다. 현덕은 사흘 전에 이미 군을 낸 터였다. 도겸은 서한을 받아 들고 읽지 못한 채 가슴에 얹었다. 구원이 이미 오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숨을 막았다. 늦었다는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미축은 평원에서 온 답신을 소매에서 꺼냈다. 현덕은 군을 냈으나 하루 더 묵은 뒤였다. 하루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다는 말을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도겸도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현덕이 아니라 자기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서한은 베개 곁에 놓였다. 도겸은 그 위에 손을 얹은 채 잠들었다가 한 시진 뒤에 깼다. 깨어나 보니 방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불을 켜지 않았다. 창틈으로 새벽안개가 들어오고 있었다.

V · 성문 안

다음 날 도겸은 성루에 올랐다. 올라가는 데만 두 번 쉬었다. 도상이 팔을 부축했으나 도겸은 계단 중간에서 아들의 손을 밀어냈다.

도겸“됐다. 내 발로 간다.”

도상“아버님, 낙상하십니다.”

도겸“넘어지면 넘어지는 거지.”

도상“아버님이 넘어지시면 이 성이 누구를 봅니까.”

도겸“성은 네가 보면 된다. 나는 올라가서 다 보고 오마.”

성가퀴를 붙잡고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성문 앞에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팽성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불을 둘러쓴 아낙, 한쪽 신만 신은 노인, 한 손에 솥뚜껑을 들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솥뚜껑은 왜 들고 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지 않고 성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백 개의 눈이었다.

조표가 도겸 곁으로 와서 낮게 말했다. 성가퀴 아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조표“주공,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저들 뒤를 조조군 척후가 따라왔다는 보고입니다.”

도겸“몇이나.”

조표“열 명 안팎이오나, 그 뒤에 본대가 있습니다.”

도겸“본대가 오는 걸 보았느냐.”

조표“보지는 못했습니다. 먼지가 올랐다고만 합니다.”

도겸“먼지로 문을 닫는구나.”

도겸“문을 열면 어찌 되느냐.”

조표“저들과 함께 척후도 들어옵니다. 성이 뚫릴 수 있습니다.”

도겸“문을 닫으면 어찌 되느냐.”

조표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겸은 자기가 한 질문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것임을 알았다. 닫으면 저 사람들이 문 앞에서 죽는다. 열면 저 사람들과 성 안 사람들이 함께 죽을 수도 있다.

도상“아버님, 일단 돌아가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도겸“바람 때문에 올라온 게 아니다.”

조표“그럼 주공께서는 무엇 때문에 올라오셨습니까.”

도겸“내 성 앞에 사람이 몇이나 서 있는지, 내 눈으로 세어 보려고 왔다.”

조표“세어서 무엇 하시렵니까.”

도겸“몰라서 세는 게다. 쓸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도상“몇이나 되던가요.”

도겸“세다가 그만뒀다. 눈이 침침해서가 아니다.”

그때 성문 아래에서 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하더니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달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도겸은 그 울음소리를 한참 들었다. 이 소리가 들릴 때는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알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성가퀴를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도겸은 성가퀴에서 손을 떼려다가 멈췄다. 손가락이 굳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상이 한쪽 손가락씩 풀어 주었다. 아들 손이 따뜻했다. 도겸은 그 따뜻함이 왠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도겸의 선택

VI · 열린 문

도겸은 새벽에 문을 열라 했다. 말하고 나서야 목소리가 의외로 컸다는 것을 알았다. 조표가 한 번 되물었으나 도겸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성루 위까지 올라왔다. 쇠가 쇠를 긁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들어갈지 정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다 한 아낙이 아이를 업은 채 한 걸음 내디뎠고 그 뒤를 따라 줄이 이어졌다. 솥뚜껑을 든 사내가 끝에서 두 번째로 들어왔다. 사내는 솥뚜껑을 성문 안쪽 땅에 내려놓고 그 앞에서 절을 했다. 누구에게 하는 절인지 알 수 없었다.

미축이 헐떡이며 성루로 올라왔다. 계단을 세 칸씩 뛰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미축“주공, 호상과 병사들이 길가에 죽을 끓여 놓았습니다. 한 솥으로는 모자랍니다.”

도겸“두 솥 끓여라.”

미축“솥이 모자랍니다.”

도겸“관아 부엌 솥을 다 가져와. 그래도 모자라면 집집마다 빌려라.”

미축“쌀이 모자랍니다.”

도겸“내 곳간에 있는 걸 풀게.”

미축“그건 군량이옵니다.”

도겸“군이 먹을 건 나중에 보고. 지금은 풀게.”

미축은 한참 도겸을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히고 내려갔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무겁게 멀어졌다.

도상“아버님, 군량까지 푸시면 병사들이 수군거립니다.”

도겸“수군거리라 해라. 굶은 병사보다 문 앞의 아이가 먼저다.”

도상“…알겠습니다.”

도겸은 성루로 지필을 가져오게 해 현덕에게 쓸 서한을 펼쳤다. 글자는 이미 머릿속에 다 있었는데 막상 붓을 들자 손이 떨려서 첫 줄도 쓰지 못했다. 도상이 붓을 대신 받아 주려 했으나 도겸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한 줄만큼은 자기 손으로 써야 했다.

서주를 맡길 사람은 이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주 사람들의 눈이 성문 안쪽에서 도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겸은 그 눈들을 피하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몸이 가벼웠다. 가벼운 대신 숨이 얕았다. 도겸은 도상의 어깨를 짚고 서서 첫 줄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빗장을 한 겹 더 걸게 한다. 저녁이 되자 성문 밖은 조용해지고, 현덕이 이틀 거리까지 왔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다시 문을 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VI · 닫힌 문

도겸은 문을 열지 않았다. 열라는 말은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대신 조표에게 빗장을 한 겹 더 걸라고 했다. 조표는 군례를 올리고 물러갔다. 그가 돌아서는 뒷모습이 안심한 사람의 것인지 아닌지 도겸은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자 성문 밖이 조용해졌다. 우는 아이 소리가 그쳤고,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지 않은 채 모여 앉아 있었다.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듯한 조용함이었다. 도겸은 그 조용함이 더 무서웠다. 두드리는 소리는 대답할 수 있었는데 이건 대답할 수 없었다.

도상이 성루에서 내려가자고 했다. 어느새 바람이 거세져 있었다.

도상“아버님, 이제 쉬셔야 합니다. 하실 일은 하셨습니다.”

도겸“내가 한 일이 뭐냐.”

도상“성을 지키셨습니다.”

도겸“…그래. 지켰지.”

도겸은 가마에 실려 내려갔다. 가마 밑에서 계단이 한 칸씩 덜컹거렸다. 방에 돌아와 눕자 천장 서까래의 얼룩이 다시 보였다. 십 년 전 비가 새서 생긴 자국이었다. 거기 눈을 박고 있는데 밖에서 병사들이 교대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 자루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열 번쯤 들리다가 멎었다.

새벽녘에 미축이 조용히 들어와 보고했다. 성 밖에 모였던 사람들 일부가 새벽 사이 어디론가 흩어졌고, 일부는 아직 남아 있다고 했다. 도겸은 눈을 감은 채 들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묻지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 수도 묻지 않았다. 대신 낮은 소리로 한마디만 했다.

도겸“현덕은 어디쯤이냐.”

미축“평원 군이 이틀 거리까지 왔다 하옵니다.”

도겸“…이틀.”

도상“아버님, 이틀이면 됩니다. 이틀만 버티면…”

도겸“성 안에서야 이틀이지. 문밖에서 이틀을 어찌 나겠느냐.”

그 이틀이 성 밖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인지 도겸은 알았다. 알면서도 다시 문을 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입 안이 썼다. 약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도겸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새벽에 문을 열라 하고 군량 곳간까지 풀어 죽을 끓이게 한다. 도상은 병사들이 수군거린다고 걱정하지만, 현덕에게 보낼 서한은 손이 떨려 첫 줄도 쓰지 못한다.

시점 3 / 3진궁조조 막하

VII · 목간

진궁은 밤마다 조조 막사 앞에 쌓이는 목간을 읽었다. 읽으라는 명은 아니었다. 누가 읽지 않으면 쌓이기만 할 것 같아서 읽었다. 하루 한 아름씩 늘어났다. 각 성과 마을에서 올라오는 이름 목록이었고,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취려 이천, 휴릉 삼천, 하비 오천. 두어 시진을 읽고 나니 숫자 옆에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적었다. 관리가 아는 이름만 적었다. 나머지는 사람이 아니라 칸 하나로 처리되어 있었다.

곁에서 서기가 붓을 쥐고 졸고 있었다. 진궁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진궁“어제 것은 어디 있나.”

서기“예, 예. 수레에 실어 뒤로 보냈습니다.”

진궁“몇 수레였나.”

서기“세 수레이옵니다. 한 수레에 목간이 백 개쯤 실립니다.”

진궁“그럼 오늘 건 왜 아직도 이 자리에 있나.”

서기“아직 옮길 사람이 없어서…”

진궁“내가 옮기지. 앉아 있어.”

서기“나으리, 숫자를 다 읽으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합계는 이미 위에 올렸습니다.”

진궁“합계는 보았네. 마을마다 누가 적혔는지 보려는 걸세.”

진궁은 목간 한 아름을 팔에 안고 막사 뒤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순욱과 마주쳤다. 순욱은 낮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얇아 보였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인사를 나눌 만한 일이 지난 사흘 안에 한 번도 없었다.

순욱“공대 공. 주공께서 찾으셨습니다.”

진궁“지금?”

순욱“지금은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다고 하셨습니다.”

진궁“내일 아침이라. 오늘 밤은 안 부르시고.”

순욱“…그렇습니다.”

진궁은 그 짧은 대답의 뜻을 알아들었다. 조조는 이제 밤에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부르면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순욱“공대 공도 들으셨겠지요. 군영 안에서 이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진궁“들었소. 입에 올리면 다음 날 이름이 목간에 오를까 두려운 게지.”

순욱“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주공께서 누구의 말도 들으시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진궁“지금이 그때요?”

순욱“제가 답을 드리면 공대 공이 곤란해지십니다.”

진궁“그럼 답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순욱“그러시는 편이 낫습니다. 서로에게.”

진궁은 목간을 수레 위에 올려놓고 한 장만 꺼냈다. 팽성 사람 이름이 적힌 마지막 장이었다. 맨 끝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진 줄이 있었다. 동문 안쪽, 우물 둘 있는 집 한 채. 그 옆에 숫자가 한 줄이었고 그 숫자 뒤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진궁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이 줄을 적은 서기는 이름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진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그 목간을 빼어 소매에 넣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한 장을 수레에 올려놓고 싶지 않았다.

VIII · 눈

다음 날 아침 조조는 막사 안 상석에 앉아 있었다. 진궁이 들어섰을 때 조조는 붓을 들고 있었다. 탁자에는 먹이 번진 목간이 펼쳐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고 쉬었다가 다시 두 번 쳤다.

조조“공대 왔는가. 앉게.”

진궁은 앉았다. 막사 안은 조용했다. 순욱도 정욱도 없었다. 조조가 일부러 비운 것이었다.

조조“자네가 어제 밤새 목간을 읽었다지.”

진궁“읽었습니다.”

조조“밤새 읽을 만한 글이던가.”

진궁“읽다 보니 밤이 갔습니다.”

조조“무엇을 보았나.”

진궁“숫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조“그리고?”

진궁은 입을 열려고 했다. 눈을 들어 조조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런데 눈이 올라가지 않았다. 조조의 눈이 아니라 조조의 턱 언저리에서 시선이 멈췄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조의 눈을 피한 적은 평생 없었다. 연주 사람들 앞에서 조조를 목사로 올리자고 말하던 때에도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지금은 그게 되지 않았다.

조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진궁에게는 답처럼 느껴졌다.

조조“말하기 어려운 것이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진궁“주공.”

조조“내가 아는 이야기일 테니까.”

진궁“아신다면 더 괴로우실 일입니다.”

조조“괴로운지 아닌지는 내가 정하네.”

진궁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조의 손이 탁자를 두 번 쳤다. 그 소리가 막사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진궁은 소매 속의 목간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접힌 모서리가 살에 닿았다.

조조“부친의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길에 서지 않았겠지. 자네도 아는 일이야.”

진궁“압니다. 그래서 더 여쭙기 어렵습니다.”

조조“어려우면 여쭙지 말게. 다만 자네가 본 숫자를 내가 이미 안다는 것만 알아 두게.”

진궁“…주공께서는 부친 일로 이 길에 오르셨습니다. 저는 그 점을 처음부터 이해했습니다.”

조조“알아.”

조조“부친을 모시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진궁“태산 쪽에서 변을 당하셨다고만 들었습니다.”

조조“그래. 변을 당했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되는 땅일세.”

진궁“그런데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이 군이 끝났을 때, 연주 사람들이 주공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게 될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조조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막사 밖에서 말이 한 번 울었다. 조조는 붓을 내려놓았다. 먹이 번져서 한 글자가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조조“공대. 자네는 나를 목사로 만든 사람이야. 그걸 잊지 않고 있네.”

진궁“예.”

조조“그러니 지금은 더 묻지 말게. 부탁이네.”

진궁은 일어서서 읍을 했다. 막사를 나서는 길에 햇빛이 눈을 찔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걸었다. 조조의 눈을 보지 못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보면 거기 자신이 보일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목사로 올린 손이, 그 손이 아직 자기 팔에 달려 있다는 것이.

진궁의 선택

IX · 남는 일

진궁은 이튿날부터 막사에 틀어박혔다. 서기들을 모아 놓고 이름을 다시 정리하게 했다. 성별로 나누고 마을별로 묶고 이름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별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쪽이 더 많았다. 어느 칸에도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서기가 붓을 내려놓고 물었다.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서기“나으리, 이렇게 나누어 어디에 쓰시옵니까.”

진궁“쓰는 게 아니네. 남기는 것이지.”

서기“누구에게 남깁니까.”

진궁“모르겠네. 나중에 누군가 보겠지.”

서기“보는 이가 없으면 어찌하옵니까.”

진궁“없으면 없는 대로 두게.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쓴 것이 낫네.”

서기“나으리는 이 일이 어찌 이리 급하십니까.”

진궁“오늘 것이 수레에 실려 가기 전에 끝내야 하네.”

서기는 더 묻지 않고 붓을 들었다. 진궁은 소매에서 목간을 꺼내 한쪽에 펼쳤다. 우물 둘 있는 집. 그 줄 옆에 아무 이름도 없었다. 진궁은 붓을 잡고 한참 망설이다가 줄 옆에 작은 글씨로 한 자를 적었다. 이름이 아니었다. 그냥 칸 하나를 비워 두었다는 표시였다.

저녁에 조조가 막사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문 밖에 서서 한참 있었다. 진궁은 붓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천 한 장이 있었다. 조조가 천천히 걸어갔다. 진궁은 그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들었다.

조조가 무엇 때문에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진궁은 그게 알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게 자기가 남는 이유 중 하나라는 것도 알았다. 그날 밤 목간은 한 아름이 아니라 반 아름이 쌓였다.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 반은 조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서기가 일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연주 동군의 장막에게 서한을 보낼 사자를 고른다. 안부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지만 새벽 안개 속에서 말에 오르지 않고, 떠날 날만 정한 채 홀로 서 있다.

IX · 서쪽

진궁은 그날 저녁 진류의 장막에게 보낼 사람을 골랐다. 믿을 만한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를 골라 서한을 맡겼다. 서한에는 안부만 적었다. 안부 한 줄 뒤에 인장을 찍고 나서 한참 있다가 한 줄을 더 보탰다. 자네 곁에 있고 싶네. 인장은 이미 찍은 뒤라 그 줄만 따로 마른 것처럼 보였다.

사자가 서한을 소매에 넣으며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사자“나으리께서는 어디로 가시옵니까.”

진궁“갈 곳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네.”

사자“그럼 소인은 나으리를 어디서 기다립니까.”

진궁“기다리지 말게. 내가 움직일 때는 기별할 틈이 없을 걸세.”

사자“그럼 이 서한은 어디까지…”

진궁“동군까지만 가면 되네. 그다음은 장 공이 알 걸세.”

사자“답이 없으면 어찌하오리까.”

진궁“답이 없는 것도 답일 수 있네. 돌아오지 말고 거기 머물게.”

사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궁은 막사로 돌아와 짐을 쌌다. 쌀 것이 많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 두 벌, 목간 몇 장, 말 먹일 보리 반 자루. 그리고 소매 속의 목간 한 장은 짐에 넣지 않았다. 계속 지니고 있었다.

새벽에 말을 끌고 진영 외곽으로 나갔다. 안개가 짙어서 십 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말뚝에 고삐를 맨 채 한참 서 있었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날 길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진궁은 올라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막사의 횃불이 하나 꺼졌다. 그다음엔 두 개가 한꺼번에 꺼졌다. 어디선가 조조가 천막 속에서 탁자를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진궁은 그래도 한참 귀를 기울였다.

그는 오늘 떠나지 않았다. 떠날 날을 정했을 뿐이다. 그 날짜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조조 곁에 남아 서기들과 사람들의 이름을 마을별로 정리한다. 우물 둘 집 줄 옆에는 이름 대신 빈 칸 표시만 남고, 저녁에 조조가 막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2장 · 루트 r2

서한

194년 봄 ~ 가을 · 학살 한복판에서 한 가족을 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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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은 같았다. 닭 한 마리 남기지 마라. 다만 이 길의 오장 하나는 출정 전에 서한 한 통을 팽성으로 보내 두었고, 그 한 통이 도착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랐다. 서한을 보낸 병사, 서한을 읽게 된 늙은 목사, 서한 한 장이 올라오는 것을 본 책사가 같은 봄에 서로 다른 쪽에서 그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잰다.

시점 1 / 3진구오장

I · 우물 둘

팽성 동문에 들어서자마자 진구는 오 사람에게 길을 따로 돌게 했다. 선봉 오에게 내려온 길은 큰길이었는데, 큰길에서 두 골목만 꺾으면 우물이 두 개 있는 집이 나왔다. 어머니 입으로 몇 번이나 들은 집이었다. 형은 글을 못 읽으니 옆집 훈장한테 읽어 달라 해야 한다고 했다. 서한이 그 훈장 손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덕만이 뒤에서 낮게 불렀다. 큰길에서 벗어난 것을 눈치챈 목소리였다.

덕만“오장님, 이쪽 아닙니다. 백부장님이 큰길로…”

진구“알아. 한 군데만 보고 간다.”

덕만“뭘 봅니까.”

진구“집.”

덕만“무슨 집이오.”

진구“그냥 집이다. 막쇠, 문 지켜.”

막쇠는 말없이 문 앞에 섰다. 진구는 대문을 밀었다. 항아리가 하나 마당에 쓰러져 있었고 부엌에 불이 꺼져 있었다. 아침을 짓던 흔적은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진구는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 장롱을 열고 다락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칼을 잡은 손을 풀어서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땀이 아니라 식은 물기였다.

방 안 벽에 서한이 붙어 있었다. 진구가 쓴 글씨였다. 성을 떠나라, 단 네 글자. 이유는 적지 않았다. 훈장이 읽어 주었다는 뜻이었고 형이 벽에 붙여 둘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떠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서한 아래에 짐 보퉁이가 하나 풀려 있었다.

진구는 서한을 떼어 소매에 넣으려다가 놓았다. 손이 부끄러웠다. 자기가 쓴 글자인데 뗄 수가 없었다.

막쇠가 문밖에서 불렀다. 숨이 반쯤 죽은 소리였다.

막쇠“오장님, 오장님. 장독대 쪽에서 소리가 났소.”

진구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장독대는 부엌 뒤쪽에 줄지어 있었다. 간장 항아리, 된장 항아리, 쌀독이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항아리 두 개 사이에 좁은 틈이 있었다.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갈 넓이였는데 거기서 숨소리가 났다. 여럿이었다.

진구는 칼집째 칼을 땅에 내려놓았다. 허리를 굽혀 틈에 대고 말했다.

진구“전보 형님 계십니까. 연주 진구입니다. 고모님 아들이오. 팽성 외가 외종이오.”

틈 속에서 숨소리가 멎었다. 한참 만에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전보“…누구라고?”

진구“동군에서 온 진구요. 어머니 이름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형님 우물 두 개 집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전보“…얘야. 네가 그 서한을…”

진구“예. 제가 쓴 겁니다. 늦었습니다.”

틈 속에서 누군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진구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서한이 닿았는데도 못 떠난 이유를. 노모가 걸음을 못 걸었거나, 아이가 아팠거나, 그냥 설마 했을 것이다.

II · 백부장

항아리 사이에서 가족이 한 사람씩 나왔다. 전보는 머리가 반쯤 희었고 허리가 굽었다. 아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열두어 살쯤 된 딸이 둘째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숨이 막힌 듯 얼굴이 붉었다. 모두 네 사람이었고 노모는 없었다. 진구는 노모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전보의 얼굴이 대답이었다.

진구는 오 사람을 마당에 불러 모았다. 덕만과 막쇠와 나머지 셋이 둘러섰다. 모두 말이 없었다. 진구는 숟가락을 두 번 세우던 버릇이 없어졌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사흘 전까지는 그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사라졌다.

진구“이 집은 내 외가다. 나는 이 사람들을 문 밖으로 내보내겠다. 너희는 못 본 걸로 해.”

덕만“오장님, 군령이…”

진구“알아.”

덕만“아니, 그게 아니라, 백부장님이 오늘 점고 때 이 집 앞을 지나간다고 했소.”

진구“언제.”

덕만“정오쯤이라고.”

진구는 하늘을 보았다. 해는 아직 중천에 닿지 않았다. 반 시진쯤 남았다는 계산이 섰다. 농사꾼이 볍씨 불리는 시간을 재던 감이었다. 그 감으로 지금 한 가족을 문 밖으로 빼내는 시간을 쟀다. 동문까지 골목 두 개, 문턱 하나. 문에는 이미 뒤쪽 오가 서 있을 것이다.

그때 골목 쪽에서 호각이 한 번 울렸다. 백부장의 호각이었다.

막쇠“오장님, 백부장님이 벌써 오시오.”

진구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가족을 다시 장독대 틈으로 밀어 넣었다. 전보의 딸이 아이를 안은 채 진구의 소매를 붙잡았다.

딸“아저씨, 우리 또 숨는 거요?”

진구“조금만. 조금만 더.”

딸“…알겠어요.”

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단단했다. 진구는 손가락을 꺾으려 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 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백부장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갑옷 끈이 풀려 있었고 눈 밑이 거뭇했다.

백부장“진구. 너 길 어디로 왔냐.”

진구“이 집이 외가라서 한 번 보고 가는 길입니다.”

백부장“외가라니.”

진구“팽성이 외가입니다.”

백부장은 한참 진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마당과 부엌과 장독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장독대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가 지나갔다. 진구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백부장“비어 있나.”

진구“예. 아무도 없습니다.”

백부장“그럼 빨리 나와라. 큰길 막으러 가야지. 쓸데없는 걸음 하지 마.”

그는 돌아서서 나가다가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등을 보인 채였다.

백부장“진구.”

진구“예.”

백부장“오늘 밤까지다. 오늘 밤까지 이 집 비어 있어야 한다. 알겠지.”

진구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부장이 나가고 나서도 마당에는 한동안 소리가 없었다. 장독대 쪽에서 아이의 숨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진구는 그 소리를 세 번 세었다. 세는 일이 그동안의 습관이라 멈추지 않았다.

진구의 선택

III · 밤의 마당

진구는 낮 동안 큰길 막는 일을 했다. 오 사람과 함께 길 가운데에 줄을 서서 창대를 가로로 들었다. 목간에 눈금을 긋는 일은 다른 오장이 맡았다. 진구는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옆 오장은 눈금을 하나 더 그었다.

해가 지고 점호가 끝난 뒤에야 진구는 우물 둘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마당이 이상하게 비어 보였다. 낮에는 없던 빈 자리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짚신 한 켤레가 땅에 있었다. 전보 형의 신이었다.

진구는 장독대 틈으로 달려갔다. 틈에는 아낙과 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딸이 젖먹이를 안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 모자랐다.

진구“형님은.”

아낙“…나갔소.”

진구“어디로.”

아낙“노모님을 찾으러. 해 질 무렵에 나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소.”

진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낮에 자기가 못 간 사이에 형이 혼자 나갔다는 얘기였다. 그걸 알았다. 알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보퉁이를 풀어 마른 보리떡 두 개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딸이 받아서 한 입 베어 물고는 한참 씹었다. 그러고는 맛이 없다는 얼굴을 하다가 그래도 삼켰다. 진구는 보리떡 맛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진구“지금 나간다. 동문은 막혔으니까 사수 쪽 둑 아래로 돌아서 간다. 말 한마디도 하지 마.”

아낙“…예.”

진구는 아이 하나를 업고 나머지 사람들을 앞세웠다. 대문을 나서면서 마당을 한 번 돌아보았다. 우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한 우물에서 두레박 줄이 달빛에 가늘게 반짝였다. 형이 돌아오면 이 줄을 잡을 것이다. 진구는 그 줄을 오래 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가족을 데리고 동문으로 가 백부장 앞에 선다. 백부장은 문 밖 이십 보까지만 허락하고 돌아오면 매 서른이라 하며, 전보는 진구에게 돌아오지 마라고 말한다.

III · 동문 앞

진구는 가족을 장독대 틈에서 끌어냈다. 전보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진구는 창을 땅에 눕혀 놓고 칼만 허리에 찼다. 덕만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진구“나 지금 간다. 네가 못 본 걸로 해라.”

덕만“…알겠소. 알겠는데 오장님, 동문 앞에 백부장님이…”

진구“알아.”

덕만“어떻게 하시려고요.”

진구“가서 말하지 뭐.”

전보와 아낙과 딸, 둘째 아이를 세우고 진구는 맨 앞에 섰다. 골목을 두 번 꺾을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건너뛰었다. 소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진구는 그게 이상했다. 며칠 동안 귀가 막혀 있었는데 지금은 발소리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들렸다. 전보의 짚신이 땅을 끄는 소리, 아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 자기 입에서 나오는 숨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동문 앞에 백부장이 서 있었다. 문틈으로 아침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백부장은 진구를 보았고 그 뒤에 선 네 사람을 보았다.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백부장“진구.”

진구“예.”

백부장“뭐냐, 그건.”

진구“제 외가 식구들입니다. 문 밖으로 내보내겠습니다.”

백부장“군령을 못 들었나.”

진구“들었습니다.”

백부장“닭 한 마리 남기지 말라 했다. 닭 말이다. 닭하고 개.”

진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백부장 자신도 닭과 개라는 말이 이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은 아직 그렇게 하고 있었다.

진구“닭하고 개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백부장“그래서.”

진구“그래서 내보내겠다고 말씀드립니다.”

백부장의 칼자루에 얹은 손이 움직였다. 덕만이 저 멀리서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막쇠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오 사람 다섯이 한꺼번에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진구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가 나오지 않았다.

백부장은 한참 서 있다가 칼에서 손을 떼었다. 손가락이 펴지는 데 오래 걸렸다.

백부장“문 밖 이십 보까지만이다. 그 이상은 못 본다.”

진구“예.”

백부장“너는 돌아와서 매를 맞는다. 서른이야.”

진구“예.”

백부장“가라.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다. 저 사람들이 네 가족이 맞냐.”

진구“…예. 맞습니다.”

백부장은 돌아섰다. 어깨가 처져 있었다. 진구는 전보를 앞세우고 동문을 나섰다. 열 보, 열다섯 보, 이십 보. 이십 보에서 멈추었다. 전보가 뒤돌아 진구를 보았다.

전보“너는 어쩌려느냐.”

진구“돌아갑니다. 매 맞고.”

전보“…돌아오지 마라.”

진구“그건 제가 정합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낮 동안 큰길을 막다가 밤에야 우물 둘 집으로 돌아온다. 전보는 노모를 찾으러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진구는 남은 아낙과 아이들을 데리고 사수 둑 아래로 돌아 나선다.

시점 2 / 3도겸서주목

IV · 네 글자

담성 안방에 낯선 종이 한 장이 올라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성 밖에서 붙들린 행상이 지닌 서한이었다. 같은 글을 두 통 써서 한 통을 따로 맡긴 듯했다. 소금 가마니 틈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미축이 그 종이를 들고 와서 도겸 앞에 놓았다.

미축“조조군 병사가 팽성 친척에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행상은 이름을 모른다 합니다.”

도겸“읽어 보았느냐.”

미축“예. 네 글자뿐입니다.”

도겸“글씨는 어떻더냐.”

미축“힘이 들어갔는데 서툴렀습니다. 붓을 오래 쥐어 본 사람의 글씨는 아니옵니다.”

도겸“그럼 농민이겠구나. 팽성에 누구를 두었기에 이런 글을 보냈을꼬.”

도겸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눈이 침침해서 촛불 가까이 댔다. 성을 떠나라. 네 글자였다. 필체가 거칠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글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힘으로 쓴 글씨였다.

도상이 곁에서 말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도상“적병이 보낸 것이 함정일 수도 있사옵니다. 성민을 흩뜨리려는…”

도겸“함정이면 이유를 적었겠지.”

도상“예?”

도겸“이유를 적지 않았다. 함정은 이유를 적는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 이건 그냥 가라는 소리다.”

도겸은 종이를 접어 베개 아래에 넣었다. 기침이 올라왔다. 한참 해야 가라앉았다. 이번엔 약 냄새가 아니라 마른 종이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미축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하면서도 눈은 방바닥을 보고 있었다.

미축“행상 말로는 그 서한을 맡긴 병사가 젊고 입이 무거웠다 하옵니다. 소금 값을 두 배로 쳐 주었다고요.”

도겸“소금 값은 왜 두 배로 쳐 줬다던가.”

미축“…말을 안 하는 값이라고 했답니다.”

도겸은 웃었다. 웃음이 기침으로 변했다. 도상이 등을 쓸어 주었다. 도겸은 숨을 고르고 천장을 보았다. 십 년 전에 비가 새서 생긴 얼룩이 보였다.

도겸“조조군 안에도 이런 놈이 있구나.”

도상“…그렇사옵니다.”

도겸“그 젊은 병사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좋겠구나.”

도겸“사람이 있다는 거지. 칼 든 군대 안에도.”

도상“아버님, 그렇다고 군이 물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도겸“알아. 알지. 다만 이 종이를 보니 내가 조조를 너무 한 덩어리로 생각했구나 싶어서.”

미축“주공, 이 병사를 찾아낼 방도는 없사옵니다. 행상이 이름도 묻지 않았다 하니.”

도겸“찾아서 뭘 하겠느냐. 찾으면 오히려 그자가 위험해진다.”

도상“그럼 이 서한은 어찌하시렵니까.”

도겸“버리지 않는다. 그뿐이다.”

미축이 헛기침을 했다. 도겸은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서한을 더듬었다. 종이의 접힌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그것이 누군가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던진 줄 같았다. 그 줄을 어디에 붙잡아 매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V · 서주

도겸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도상을 불러 앉혔다. 도상은 눈이 붉었고 어깨가 처져 있었다.

도겸“간밤에 그 종이를 몇 번이나 폈다 접었는지 모르겠다.”

도상“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도겸“자려고 누우면 네 글자가 천장에 붙어 있더구나.”

도겸“너는 서주를 맡을 수 있겠느냐.”

도상“아버님.”

도겸“대답해라.”

도상“…맡으라 하시면 맡겠습니다.”

도겸“맡으라 하면이 아니라 맡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도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뒤에 낮게 말했다.

도상“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이 없습니다. 조조와 싸울 자신도, 이 성을 오래 지킬 자신도.”

도겸은 아들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았다. 화가 치밀지도 않았고 목이 메지도 않았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도상“실망하셨습니까.”

도겸“실망했으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내가 부끄럽다.”

도겸“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나도 너를 키우면서 한 번도 가르치지 못한 게 있다. 싸우는 법이었다.”

도상“아버님은 늘 문장을 가르치셨습니다.”

도겸“그래서 지금 이 꼴이지.”

도상“아버님은 현덕에게 서주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도겸“아직 정하지 못했다. 다만 네가 지켜 내지 못한다면 지켜 낼 사람에게 넘기는 게 맞다.”

도상“제가 못났다는 말씀이시지요.”

도겸“못났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걸 네게 묻고 있는 거다.”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창밖에서 새벽 닭이 울었다. 담성 안에는 아직 닭이 있었다. 도겸은 그 소리를 듣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축이 문을 열고 들어와 평원에서 온 서한을 올렸다. 현덕의 군이 이틀 거리까지 닿았다는 내용이었다. 도겸은 서한을 읽고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네 글자 서한을 꺼내 현덕의 서한 곁에 나란히 놓았다. 한쪽은 정중한 필체였고 한쪽은 힘으로 눌러 쓴 글자였다.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종이 두 장이었다.

현덕이 새벽에 군을 낸 덕에 이틀 거리까지 닿았다는 것을 도겸은 알았다. 하루도 묵지 않고 달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네 글자 서한 곁의 정중한 글씨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 서둘러 온 길 위에서 팽성의 불길이 어디까지 번졌는지는 아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현덕이 하루를 묵은 뒤에야 군을 냈고 그 하루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다는 것을 도겸은 알았다. 이틀 거리라는 글자 옆에 그 하루가 보이지 않는 획처럼 붙어 있었다. 네 글자 서한이 빼낸 한 가족의 길이 그 하루만큼 더 좁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축“아울러 성 안 곡식을 다시 세어 보았는데, 피난민까지 들이면 두 달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도겸“두 달이라. 현덕이 이틀이면 닿는데 두 달이 무슨 소용이냐.”

도상“그래도 문을 닫으면 두 달은 버팁니다.”

도겸“두 달 뒤에 남는 건 문 안의 우리뿐이다.”

도겸“자중. 현덕은 어떤 사람인가.”

미축“…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는 분이라 들었사옵니다.”

도겸“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럼 어렵게는 버린다는 말이냐.”

미축“…그것까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도겸“알 수 없는 게 맞다. 아는 척하는 놈보다 낫다.”

도겸“내 아들에게는 버거운 분이겠구나.”

미축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겸은 책상 위의 두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 쪽에 손을 얹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도겸의 선택

VI · 두 장의 종이

도겸은 새벽에 문을 열라 했다. 도상이 한 번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문이 열리자 피난민이 한 줄로 걸어 들어왔다. 솥을 이고 선 아낙, 이불을 둘러쓴 노인, 신발 한 짝만 신은 아이가 지나갔다. 그 틈에 팽성 억양을 가진 사람이 섞여 있었다.

도겸은 성루에서 현덕에게 쓸 서한을 썼다. 서주를 맡긴다는 말은 끝내 쓰지 못하고 한 줄로 줄였다. 당신이 오면 문을 열겠소, 이미 열어 놓았소. 도상이 곁에서 먹을 갈았다.

도상“아버님, 이 문장은 너무 짧습니다.”

도겸“길면 읽지 않는다.”

도상“그래도 조금만 더…”

도겸“됐다. 네 글자 서한이 사람을 움직이더라. 나도 몇 줄이면 된다.”

서한 두 장은 나란히 놓였다. 한 장은 현덕에게 갈 것이었고, 한 장은 도겸이 가슴에 품었다. 이름도 모르는 병사가 팽성 친척에게 보낸 네 글자는 어느 장수의 손에도 가지 않고 늙은 주목의 품에서 마를 것이었다.

도상이 먹을 갈던 손을 멈추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이 오랜만에 덜 잿빛이었다.

미축“주공, 피난민 중에 팽성에서 온 이들이 섞여 있사옵니다. 서한 이야기를 물어볼까요.”

도겸“묻지 말게. 받은 사람이 있다 한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미축“그럼 그대로 두겠사옵니다.”

도겸“대신 먹이게. 먼저 먹이게.”

미축이 아침 죽을 가져왔다. 도겸은 오랜만에 한 사발을 비웠다.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나 따뜻했다. 도겸은 사발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도겸“누구인지 알았으면 이름이라도 불러 줬을 것을.”

도상“병사가 살아 있다면 이 소식이 그에게도 닿았을 것입니다.”

도겸“닿았기를 바랄 뿐이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문을 닫아 두고 현덕에게 구원만 청하는 서한을 쓴다. 오후에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다 해 질 녘에 멎고, 도겸은 끝내 성루에 오르지 않는다.

VI · 빗장

도겸은 문을 열지 않았다. 열라는 말을 입 안에서 굴리다가 도상의 얼굴을 보고 삼켰다. 아들의 눈이 문을 열면 버티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겸은 현덕에게는 구원만 청하는 서한을 따로 썼다. 서주를 맡긴다는 말은 지웠다.

도상“아버님, 감사합니다.”

도겸“감사할 것 없다. 이건 아비가 하는 일이야.”

도상“그래도 저 때문에…”

도겸“너 때문이다. 하지만 감사할 것은 없다.”

도상은 입을 다물었다. 도겸은 베개 밑에서 네 글자 서한을 꺼내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넣었다. 이 종이가 문을 열라는 소리인지 닫으라는 소리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는데, 알고도 손이 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성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 밖에서 누군가 한 번 두드렸고 한동안 조용하다가 다시 두드렸다. 도겸은 성루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방 안에서 그 소리만 들었다. 한 번, 쉬고, 한 번. 소리가 몇 번인지 세다가 열에서 그만두었다.

미축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말씨는 공손했으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미축“주공, 성 밖 사람들이 계속 두드립니다. 어찌할까요.”

도겸“…그냥 두게.”

미축“예.”

도겸“해 지기 전에는 그칠 걸세.”

미축“예. 다만 군사들이 수군거립니다. 문을 열지 않는 이유를 묻는 자도 있사옵니다.”

도겸“이유를 물으면 서주목이 그렇게 명했다 하게.”

미축“주공의 뜻이 아니라 명이라고 말입니까.”

도겸“그래. 내 뜻이라고는 하지 말게.”

미축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도겸은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해 질 녘에 소리가 멎었다.

도상“아버님, 소리가 그쳤습니다.”

도겸“그래. 그쳤구나.”

도상“…주무십시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새벽에 문을 열어 피난민을 들이고 현덕에게 짧은 서한을 쓴다. 팽성 억양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들어오고, 그는 오랜만에 아침 죽 한 사발을 비운다.

시점 3 / 3진궁조조 막하

VII · 군법

진궁이 군법 목간을 받은 것은 초경이 막 지났을 때였다. 서기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와서 말없이 내밀었다. 위에 먹으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군령 위반, 동문 이십 보 밖 사람 방면, 진구 오장.

진궁은 읽고 눈을 들었다. 서기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진궁“이게 무엇인가.”

서기“백부장이 올린 것이옵니다. 이 자를 처벌하라는 보고가 아니라 처벌했다는 보고이옵니다. 서른 대를 쳤다 하옵니다.”

진궁“서른 대.”

서기“매는 제 손으로 헤아렸다 하옵니다. 열 대째에 이를 물었고 서른 대째까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합니다.”

진궁“누가 그리 전하던가.”

서기“매를 친 군졸이 막사에서 술자리 삼아 하는 말이옵니다.”

진궁“술자리 삼아라…”

서기“사흘 뒤 군영에 복귀했다 하옵고, 다시 전열에 서 있다 합니다.”

진궁“누가 그를 풀어 주었는가.”

서기“백부장이 눈감아 주었다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참수였을 것이옵니다.”

진궁“매를 맞고도 전열에 섰다는 건 어느 쪽이던가. 복종인가, 오기인가.”

서기“소인은 모르옵니다. 다만 군졸들은 오기라 하옵니다.”

진궁“오기라…”

진궁은 목간을 내려놓았다. 가슴 어딘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팽성 목록 끝줄에 적힌 우물 둘 있는 집과 같은 자리였다. 그 이름 없는 숫자와 이 이름 있는 오장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는 것을 진궁은 알았다.

진궁“이 자는 어떤 자인가.”

서기“연주 동군 농민 출신이옵니다. 어머니가 팽성 사람이라 하옵고, 가족 넷을 빼냈다 하옵니다.”

진궁“가족 넷.”

서기“예.”

진궁“외가가 맞는가.”

서기“군졸 말로는 외가 사람 넷이라 하옵니다. 노인과 아낙과 아이 둘이라 합니다.”

진궁“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가.”

서기“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진구 오장만이 알 것이옵니다.”

진궁은 한동안 목간만 쳐다보았다. 가족 넷이라는 숫자가 이 군영에서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만 단위를 세는 목간 옆에서 넷은 점도 못 되었다. 그런데 이 넷은 이름이 있었다.

진궁“이 목간은 어디 올렸나.”

서기“나으리께 먼저 올렸사옵니다. 이후에는 주공께…”

진궁“올리지 말게.”

서기“예?”

진궁“내가 가져가겠네. 직접 말씀드리지.”

서기“나으리, 군법 목간을 사사로이 가져가시면 문책이 있사옵니다.”

진궁“문책은 내가 받네. 자네는 올린 적이 없는 것으로 하게.”

서기“…그리하겠사옵니다.”

서기는 놀란 눈으로 진궁을 보았다. 진궁은 목간을 소매에 넣었다. 소매에 넣을 때 손가락 끝이 조금 떨렸다. 떨림을 서기가 못 본 척해 주었다.

VIII · 한 사람

이튿날 이른 아침 진궁은 조조의 막사에 들어갔다. 조조는 일어나 있었고 이미 갑옷을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진궁은 처음으로 조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다. 화가 없었고 슬픔도 없었다. 눈이 마른 사람 같았다.

조조“자네 얼굴이 어제와 다르군.”

진궁“잠을 못 잤습니다.”

조조“누구는 잤겠나.”

조조“무슨 일인가, 공대.”

진궁“군법 하나를 보고드립니다.”

조조“줘 보게.”

진궁은 소매에서 목간을 꺼냈다. 조조는 훑어보고 탁자에 놓았다. 손가락이 탁자를 두 번 쳤다.

조조“서른 대 맞았으면 됐지.”

진궁“예.”

조조“그런데 왜 가져왔나.”

진궁“이 자를 다른 곳에 두면 어떻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조조“다른 곳이라니.”

진궁“군량을 지키는 일이나, 서한을 전하는 일이나, 뭐든 칼에서 먼 곳에.”

조조는 진궁을 쳐다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진궁은 그게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조조“공대. 자네는 한 사람 때문에 말하는가.”

진궁“…그렇습니다.”

조조“한 사람 얘기는 하면서 만 명 얘기는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진궁“이상합니다.”

조조“그런데 왜 한 사람 얘기를 하나.”

진궁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있었다. 만 명 얘기는 이미 오래전에 꺼냈어야 했는데 꺼내지 못했다. 한 사람 얘기라서 꺼낼 수 있었다. 그건 변명이었고 그가 아는 한 가장 비겁한 이유였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조조“좋아. 그 자는 자네가 맡게.”

진궁“예.”

조조“이름이 뭐라 했나.”

진궁“진구입니다. 동군 출신 오장입니다.”

조조“진구라. 기억해 두지는 않겠네. 기억하면 다음에 또 보게 되니까.”

진궁“…그렇게 하십시오.”

조조“다만 한 가지. 자네가 그자를 맡는 것으로 만 명이 달라지는 건 아니네.”

진궁“알고 있습니다.”

조조“알면 됐네.”

진궁“주공,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조조“또 있는가.”

진궁“팽성 목록 끝줄에 우물 둘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오장이 빼낸 넷이 전부였습니까.”

조조“그건 서기에게 물을 일이지 내게 물을 일이 아니네.”

진궁“주공께서 아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조조“…나는 숫자를 보지 않네. 보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서 있지 못해.”

조조는 탁자에서 눈을 떼고 막사 밖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천막 틈으로 들어와 그의 갑옷에 가늘게 닿았다. 진궁은 그 빛을 보면서 이 사람이 자기가 처음 보았던 조조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 따져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따져 봐야 소용이 없었다.

진궁의 선택

IX · 이름 하나

진궁은 진구를 군량 수송대 서기로 옮기는 서한을 썼다. 서한은 간단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병사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달았다. 진구는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그 점은 보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르치면 될 일이었다.

서기 하나가 서한을 받아 들고 머뭇거렸다. 글자를 읽고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서기“나으리, 진구라는 자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하옵니다. 서기로 쓰시면 곧 탄로 납니다.”

진궁“글자는 가르치면 되네. 사람을 한 칸 옮기는 것이 먼저일세.”

서기“…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조조 막사를 나서는 길에 순욱이 진궁을 불러 세웠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순욱“공대 공, 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빼내셨다고.”

진궁“한 사람뿐이오.”

순욱“저도 한 사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궁“누구요.”

순욱“주공입니다.”

진궁은 순욱을 쳐다보았다. 순욱의 얼굴은 평소처럼 단정했다. 그러나 눈 아래 선이 오늘 따라 깊었다.

순욱“우리가 모두 한 사람씩 빼내려 하면 군은 흩어지겠지요. 그래도 아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진궁“…나은 것인지 모르겠소.”

순욱“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서 있었다. 먼 데서 점고 호각이 울렸다. 진궁은 소매에 든 목간 한 장을 만졌다. 팽성 목록 끝줄의 그 우물 둘 집. 거기에 이름을 적을 사람이 아직 한 명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구라는 이름의 오장이었다. 목간 하나가 한 사람의 자리를 옮겼을 뿐이었다. 그래도 진궁은 오랜만에 붓이 가볍다고 느꼈다. 진구가 이 서한이 누구 손에서 나왔는지 알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알든 모르든 서한은 이미 군량 수송대로 가는 길에 올라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밤에 장막에게 보낼 서한을 쓰고 자네 곁으로 가고 싶다는 한 줄을 더한다. 사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진궁은 새벽 안개 속 말 곁에서 목간 한 장을 만지작거린다.

IX · 서찰

진궁은 그날 밤 서한을 썼다. 진류의 장막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안부를 적고, 한 줄을 더했다. 자네 곁으로 가고 싶네. 인장을 찍으려다가 손이 멈췄다. 인장은 오래 눌려 있어야 했다. 한참 쥐고 있다가 겨우 찍었다.

사자를 불렀다. 젊은 사내였다. 진궁이 서한을 건네자 그는 소매에 넣으면서 물었다.

사자“나으리께서 직접 오시는 것이옵니까.”

진궁“아직 모르겠네. 때를 보겠네.”

사자“때라니요.”

진궁“전해 줄 것은 서한뿐이네. 나머지는 자네가 알 일이 아니야.”

사자“장 공께는 무어라 아뢰오리까.”

진궁“읽으시면 아실 걸세. 말로 보태지 말게.”

사자는 고개를 숙이고 어둠으로 사라졌다. 말발굽 소리가 한동안 들리다 안개에 묻혔다. 진궁은 막사에 돌아와 앉았다. 소매 속에서 조조에게서 돌려받은 목간 한 장이 만져졌다. 진구라는 오장의 군법 목간이었다. 그걸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계속 지니고 있었다. 이 자를 구하자고 조조에게 말했을 때 조조의 눈이 마른 것을 보았고, 그 눈을 보고 나서 이 사람 밑에서 계속 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떠난다는 결심과 같지 않았다. 진궁은 그 차이를 안다고 믿었다. 그는 말에 안장을 얹지 않았다. 서한은 이미 어둠 속으로 갔다. 돌아오는 건 말과 달리 한참 걸릴 것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진궁은 밖으로 나갔다. 안개가 짙었다. 말이 말뚝 곁에서 풀을 씹고 있었다. 진궁은 그 곁에 한참 서서 말의 목덜미를 쓸어 주었다. 말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숨을 쉬었다. 소매 속 목간이 말의 체온 때문인지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때 진영 쪽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조조 곁에 남아 진구를 군량 수송대 서기로 옮기는 서한을 쓴다. 순욱은 자신도 한 사람만 생각한다고 말하고, 진궁은 오랜만에 붓이 가볍다고 느낀다.

제2장 · 루트 r3

거둔 칼

194년 봄 ~ 가을 · 칼을 거둔 자리에서 군중이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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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군령에서 한 줄을 지웠다. 그 줄이 지워졌다는 소문은 군령보다 먼저 서주 땅에 들어섰고, 병사들은 소문의 뜻을 제각기 읽었다. 병사들은 대효라는 말을 외치며 남의 창고 문을 열었다. 칼을 거둔 대장, 그 아래의 오장, 성 안의 노인, 곁을 지키던 책사가 서로 다른 불빛 아래에서 같은 봄을 본다.

시점 1 / 3진구오장

I · 불난 창고

서주 땅에 들어선 지 이틀째 저녁이었다. 사수 상류의 이름 모를 마을 어귀에서 진구의 오가 걸음을 멈췄다. 앞쪽 곡식 창고의 초가지붕이 벌써 통째로 타고 있었다. 불길은 누런 연기를 한 줄로 뽑아 올렸고, 불 앞에서는 어느 오 소속인지 모를 병사 하나가 투구를 벗어 든 채 웃고 있었다.

덕만“오장님, 저거 보시오. 쌀가마가 저렇게 쌓였는데 누가 안 집어 가겠소.”

진구“가져가라고 한 적 없다.”

덕만“군령에서 그 줄 지웠다면서요. 닭이니 개니 하는 거. 그럼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는 거고…”

진구“지운 건 닭하고 개다. 쌀은 안 지웠어.”

덕만“쌀은 원래 안 적혀 있었는데 무슨 소리요.”

진구는 대꾸하지 못했다. 덕만 말이 맞았다. 군령에 있던 것은 닭과 개였고 지워진 것도 닭과 개였다. 그런데 그 말을 병사들이 어떻게 들었는지는 진구도 알았다. 대장이 약해졌다는 소문이 군영 안을 사흘 만에 한 바퀴 돌았고, 약해진 대장 밑에서는 먼저 집는 놈이 임자라는 소문이 뒤따라 돌았다.

진구는 행군 사흘째 밤에 그 소문이 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직접 들었다. 불가에서 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누가 킬킬 웃었다. 웃음소리가 한 번 돌고 나자 모닥불 곁에 둘러앉은 얼굴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먹는 손이 빨라졌고 눈이 짐수레 쪽을 오갔다. 그날 이후로 진구는 밤마다 오 사람들 짐을 한 번씩 눌러 보았다. 눌러 보면 안다. 어제보다 무거워졌는지.

막쇠는 벌써 어깨에 쌀자루를 하나 메고 있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묻기도 전에 막쇠가 먼저 변명하듯 웃었다.

막쇠“이게 다 대효 아니오. 주공 아버님 몫으로 딱 한 자루만.”

진구“내려놔.”

막쇠“예?”

진구“내려놓으라고. 어디서 났는지 말 못 하면 내려놔.”

막쇠는 투덜거리며 자루를 땅에 놓았다. 그러고는 입을 비죽였다.

막쇠“오장님은 참 융통이 없소. 저쪽 오 놈들은 벌써 수레째 싣는데.”

진구“저쪽 오 일은 저쪽 오장이 알아서 한다.”

막쇠“그럼 우리만 손해 아니오.”

진구“손해는 나중에 따진다.” 진구는 자루를 내려다보며 무게를 셈했다. 두 말쯤이다. 두 말이면 팽성 외사촌네 여덟 식구가 열흘을 먹는다. 거기까지 셈하고 나서야 진구는 이상한 걸 깨달았다. 외사촌네가 아직 거기 있는지도 모르면서 쌀부터 헤아리고 있었다.

그때 백부장이 말을 타고 불빛 속에서 나타났다. 얼굴이 불 때문에 반쪽만 붉었다.

백부장“진 오장. 네 오 데리고 창고 앞 길 막아라.”

진구“불은 안 끕니까.”

백부장“끄지 마. 마을 사람들이 곡식 건지겠다고 달려들면 우리 병사들이랑 엉킨다. 길만 막아. 한 놈도 들이지 말고.”

진구“군령에는 백성을 건드리지 말라고…”

백부장“건드리라는 게 아니다. 막으라는 거다. 서 있기만 하면 돼.”

백부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가다 말고 어깨 너머로 한마디를 던졌다.

백부장“대장이 약해졌다는 소리 너도 들었지? 그 소리가 맞는 말 되게 하고 싶으냐.”

II · 길 막기

진구는 오 사람을 두 줄로 세웠다. 창을 눕혀 길 폭을 가로막았다. 어깨가 서로 닿을 만큼 붙어 서야 했다. 풀로 묶은 왼쪽 신 끈이 걸을 때마다 발목을 스쳤다. 어머니가 삼아 놓은 새 신이 지금도 문 기둥에 걸려 있겠지 하는 생각이 났다가 불 소리에 묻혔다.

마을 사람들은 곧 몰려왔다. 처음엔 서넛이었고 그다음엔 줄이 길어졌다. 맨발인 사람도 있었고 바가지를 든 아낙도 있었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소리를 질러 주는 쪽이 차라리 나았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창 앞에 서서 불붙은 지붕만 올려다봤다.

진구 바로 앞에 선 아낙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 들고 있었다. 불에 끼얹을 물이었다. 지붕까지 닿지도 못할 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낙은 바가지를 내려놓지 않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서 있었다. 물이 흔들려 바가지 가장자리로 한 방울씩 넘쳤다. 진구는 그 물방울이 마른 땅에 떨어져 금세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노인“군관 나리. 저 안에 종자 볍씨가 있소. 올해 심을 거요. 그것만 꺼내게 해 주시오.”

진구“…안 됩니다.”

덕만“오장님, 저 노인 눈을 못 보겠소.”

진구“보지 마라. 앞만 봐.”

노인“볍씨만. 한 말도 안 되오.”

진구“지금은 안 됩니다. 불이 잡히면…”

노인“불이 잡힐 리가 없잖소.”

진구는 입을 다물었다. 볍씨라는 말이 귀에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못자리에 넣을 볍씨가 타면 그 집이 올해 무엇으로 사는지, 그 셈은 눈을 감고도 됐다. 그는 창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만 따뜻했다. 나머지 몸은 불 가까이 서 있는데도 식어 있었다.

등 뒤에서 병사들이 곡식 가마를 끌어내는 소리가 났다. 가마가 땅을 끄는 소리, 수레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 누가 웃으며 누구 이름을 부르는 소리. 진구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얼굴들을 오늘 밤 안에 다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창대 밑으로 작은 것이 하나 빠져나왔다. 아이였다. 일고여덟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창과 창 사이를 몸을 숙여 지나 불 쪽으로 서너 걸음을 달려가다가, 타다 떨어진 짚 더미 앞에서 멈췄다. 불길이 아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아이가 돌아서서 진구를 올려다봤다.

아이“아저씨 신 끈이 풀이네.”

진구“…뭐?”

아이“풀로 묶었네.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했는데. 금방 끊어져.”

진구는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마디를 꺾으려고 손가락에 힘을 줬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불 소리가 너무 컸던 건지 마디가 굳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짚 더미 곁에 쪼그려 앉아 타지 않은 낟알 몇 알을 주워 손바닥에 올렸다.

덕만“오장님, 저 애 저기 있으면…”

그 순간 머리 위 서까래 하나가 부러지며 불덩이가 아이 쪽으로 떨어졌다. 불덩이는 아이 머리 위를 스쳐 땅에 튀었다. 아이는 손바닥의 낟알을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맞은편에서 백부장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백부장“진 오장! 길 막으랬지, 서 있으랬지! 뭘 보고 있어!”

진구의 선택

III · 눈 감은 자리

진구는 창을 눕힌 채 서 있었다.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감는 대신 불붙은 서까래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떨어진 불덩이가 아이를 피해 튀었는지 아이가 불을 피해 몸을 비틀었는지는 보지 않았다.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중에 덕만이 입을 열어서야 알았다. 노인이 아이를 끌어다 품에 안았다고 했다.

덕만은 그 말을 하면서 진구의 얼굴을 살폈다. 진구가 아무것도 묻지 않자 덕만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막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 사람들 몫의 죽 그릇을 날랐다. 평소 같으면 한 사람이 한마디씩은 보탰을 자리였다.

덕만“오장님 괜찮소? 얼굴이 하얗소. 물이라도 한 모금 하시오.”

진구“괜찮다. 줄이나 맞춰.”

덕만“줄은 맞았소. 다 맞았소. 맞았는데…”

진구“맞았으면 됐다.”

불은 밤이 깊어서야 잦아들었다. 창고는 검은 뼈대만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창 앞에서 한 사람씩 돌아섰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돌아서며 진구에게 뭐라고 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보였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이 꺼진 뒤에도 귀가 먹먹했다. 물속에서 사람 입을 보는 것 같았다.

저녁 죽은 맛이 없었다. 어머니의 보리떡 열 개를 혼자 먹던 기억이 났는데 그것도 맛이 나지 않았다. 숟가락을 상에 세워 두 번 치려다 말았다. 손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허공에서 멈췄다. 막쇠가 쳐다보고 있어서 숟가락을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

백부장이 지나가며 진구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손이 무겁지 않아서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백부장“잘했다. 이게 군이다.”

진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 끈이 또 풀려 있었다. 풀로 묶은 것은 하루를 못 갔다. 그는 쪼그려 앉아 새 풀을 뜯어 다시 묶었다. 매듭을 조일 때 손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그것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창과 칼을 내려놓고 낟알을 쥔 아이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아이를 노인의 집 앞까지 데려가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말 위에서 기다리는 백부장이 있다. 내일 점고 때 열 대다.

III · 내려놓은 칼

진구는 창을 땅에 눕혔다. 소리가 났다. 칼도 풀어 창 위에 얹었다. 덕만이 눈을 크게 떴지만 말릴 틈은 없었다. 진구는 대열을 벗어나 불붙은 짚 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달리지 않았다. 달리면 군령을 어기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아이는 낟알을 쥔 채 서 있었다. 진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가늘고 땀에 젖어 있었다.

진구“가자.”

아이“아저씨 이름이 뭐요.”

진구“진구다. 가자.”

아이“곡식 안 가져가고요?”

진구“그건 나중에. 지금은 가자.”

아이는 낟알을 쥔 손을 가슴에 모으고 따라 걸었다. 진구는 창고 뒤 담장을 돌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백부장이 소리를 질렀지만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불이 번져 오는 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아이네 집까지는 다섯 걸음이면 됐다. 아이가 먼저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누가 문을 열자 아이의 손이 진구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진구는 손을 오므렸다. 아이 손의 땀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제야 딱 소리가 났다. 오른손 중지 마디가 꺾이는 소리였다. 꺾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났다.

마디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났다. 진구는 손을 한참 내려다봤다. 이 소리가 나면 으레 다음에 숟가락을 두 번 치는 것이 순서였는데, 오늘은 칠 숟가락이 없었다.

돌아가자 백부장이 길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에는 불빛이 번져 있었다.

백부장“칼은 어디 있느냐.”

진구“…놓고 왔습니다.”

백부장“창고 앞에 있다. 가서 주워 와. 그리고 내일 점고 때 내 앞에 서라. 열 대다.”

진구“예.”

백부장“네가 한 번 더 이러면 열 대로 안 끝난다. 알아들었냐.”

진구는 고개를 숙였다. 덕만이 오 사람 줄에서 눈을 피했고, 막쇠는 대놓고 그를 쳐다봤다. 눈빛이 존경도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무엇을 본 얼굴이었다. 진구는 창고 앞으로 걸어가 창 위의 칼을 집어 들었다. 칼자루가 차가웠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길을 막고 서서 불붙은 서까래의 숫자만 센다.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중에 덕만의 입을 통해서야 듣는다. 백부장은 이게 군이라고 말하고, 신 끈은 또 풀려 있다.

시점 2 / 3도겸서주목

IV · 약 냄새

담성 관아의 안방은 약 달이는 냄새로 가득했다. 도겸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데서 무언가 걸렸다. 기침이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베개 맡에는 종이쪽이 널려 있었고 그 위에 약사발이 놓여 있었다.

도상“아버님, 오늘은 드셔야 합니다. 어제도 거의 못 드셨습니다.”

도겸“먹었다. 아침에…”

도상“미음 반 사발이었습니다.”

도겸“그러냐. 반이면…”

말끝은 흐려졌다. 도겸은 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서른이 넘은 아들인데 눈썹이 밑으로 처지는 버릇이 아직 소년 같았다. 아들이 약사발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도겸은 그 손을 보다가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도상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는 바람처럼 가늘었다.

도상“아버님, 주무십시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도겸“자면 꿈에 나올 것 같아서 그런다. 불탄 마을들이.”

도상“아직 꿈에 나올 만큼 보신 것도 없습니다.”

도겸“본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게 더 나쁘지.”

미축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병상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옷자락에 재가 묻어 있었다. 아침부터 성 밖을 돌고 온 것이었다.

미축“주공, 성 밖 마을 세 곳이 탔습니다. 사수 가까운 마을은 아직 소식이 닿지 않습니다.”

도겸“조조가 칼을 거뒀다 하지 않았나. 파발이 그렇게…”

미축“군령은 거뒀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그 말을 달리 들은 모양입니다. 대효라는 말을 외치며 다닌다고 합니다.”

도겸“대효라. 효라고.”

도겸은 그 말을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효라는 글자는 평생 아들에게 가르치던 글자였다. 아침마다 도상이 문안을 올 때 속으로 흡족해하던 글자였다. 그 글자가 이제 불 지르는 병사들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도겸은 기침을 했다. 한참 걸렸다. 도상이 등을 쓸어 주려 하자 도겸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입가를 닦은 수건에 붉은 얼룩이 보였다. 아들과 미축이 그걸 못 본 척했다.

도겸“나는 그 어른께 사람을 보낸 적이 없네. 맹세하라면 하지. 장개 그놈이 재물을 보고…”

도상“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도겸“알고 있다고 하지 마라. 내가 모르겠다. 장개를 내가 데리고 있었다. 내 사람이었다.”

방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누가 물동이를 옮기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멀어지자 방 안은 더 조용해졌다. 약사발의 김이 다 날아가고 있었다. 도겸은 장개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도위 하나의 얼굴이 이렇게 흐려질 줄은 몰랐다. 그는 그 얼굴이 흐려지는 것이 자기 눈 때문인지 그 일 때문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V · 성루

오후에 도겸은 가마를 타고 성루에 올랐다. 도상과 미축이 한 번씩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가마에서 내리는 데만 반 각이 걸렸다. 성가퀴를 붙잡고 겨우 서서 성 밖을 내려다보았다.

성가퀴 위의 바람은 병상 곁의 바람과 달랐다. 약 냄새 대신 연기 냄새가 났고, 연기 냄새 밑에는 젖은 흙 냄새가 깔려 있었다. 사수에서 올라오는 봄 안개였다. 안개 속에서 성 밖의 모든 것이 한 겹 흐릿하게 보였다. 그게 도겸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것도 같았다.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수레에 이불을 실은 가족, 솥을 이고 선 아낙, 소 한 마리를 끌고 와 땅에 주저앉은 사내가 보였다. 문은 닫혀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대신 성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개의 얼굴이 한결같이 위를 향했다.

도상“아버님,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바람이 찹니다.”

도겸“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느냐.”

미축“어젯밤부터입니다. 문을 열지 못하게 하셨기에…”

도겸“내가 그랬나.”

미축“사흘 전 군의에서 그리 정하셨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겸“그랬겠지. 그때는 그게 옳아 보였겠지.”

도상“조조 쪽 간자가 섞여 들어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도겸“저 사람들 가운데 간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도겸은 성가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멀리 북쪽 길 끝에 흙먼지가 한 줄 일고 있었다. 깃발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먼지가 군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성 아래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올라왔다. 한 번 울기 시작한 아기는 달래는 손길을 만났는지 곧 잦아들었고, 잦아든 자리에 다른 아기 울음이 이어졌다. 도겸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다시 성가퀴를 쥐었다. 자기 손이 이렇게 말랐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서주를 맡은 지 몇 해인데 손이 이렇게 마르도록 맡아 온 것인지, 이 봄에 한꺼번에 마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축이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눈이 좋은 사람이라 먼지 속의 깃대 끝까지 가려 보는 듯했다.

미축“평원 쪽 파발이 오늘 새벽에 닿았습니다. 전해의 군과 유 평원상의 군이 하루 거리랍니다. 지금쯤이면…”

도겸“저 먼지가 그건가.”

미축“아마도.”

도겸은 먼지를 보며 현덕이 새벽에 곧바로 군을 냈다던 말을 떠올렸다. 그 하루가 아니었다면 저 먼지는 아직 평원 들판에 있었을 것이다. 고마운 일인데도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군기가 풀린 성 밖의 불길을 보면서 그 빠른 걸음마저 모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겸은 먼지를 보며 현덕이 하루를 묵고서야 군을 냈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하루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고, 지금 성 밖에서 타는 불길도 그 틈에서 번진 것이었다. 그를 탓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지 도겸은 알 수 없었다. 먼저 구원을 청하지 않은 것도 자기였다.

도겸“문을 열면 저 사람들이 들어오겠지. 저 안에 병사와 백성이 섞이면 먹일 쌀이 모자란다. 닫아 두면…”

도상“닫아 두면 성 밖 사람들은 조조 군 앞에 남습니다.”

도겸“그래. 알아.”

미축“주공, 평원상이 하루 거리면 오늘 밤 안에 문 앞에 닿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정하셔야…”

도겸“정한다. 정하마. 잠깐만…”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도겸은 성 밖과 성 안을 번갈아 보았다. 성 안쪽 지붕들 위로는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성 밖의 연기는 방향이 달랐다. 검고 낮았다. 아들과 미축은 숨을 죽이고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성 아래에서 처음으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겸의 선택

VI · 열린 문

도겸은 미축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두 번을 말해야 했다.

도겸“자중, 문을 열게.”

미축“예?”

도겸“열라고. 평원 사람들 오는 대로 들이게. 저 성 밖 사람들도 같이.”

도상“아버님, 쌀이…”

도겸“알아. 알아서 말하지 마라. 쌀은 내가 찾아보겠다. 찾아서…”

기침이 나왔다. 도겸은 성가퀴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견뎠다. 숨이 고르게 돌아오자 도겸은 미축에게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도겸“그 평원상이란 사람… 오면 내 곁으로 데려오게. 이름이 현덕이라 했지.”

미축“예, 주공.”

도겸“그리고 의원들에게 말하게. 성 밖에서 온 아이들부터 먼저 보라고. 약값은 내 사재에서…”

미축“약값은 제가 대겠습니다.”

도겸“자네 돈은 아껴 두게. 앞으로 쓸 데가 많을 걸세.”

도겸“그 현덕이란 사람, 내 아들들보다 낫다는 소문이던데. 만나 보고 싶네. 서주를 맡길 사람인지는 만나 봐야 알겠지만…”

도상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의 눈썹이 밑으로 처졌다. 도겸은 아들을 보지 않으려고 성 밖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성루까지 올라왔다. 무거운 빗장이 들리고 문짝이 땅 위를 스르르 긁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아니라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문기둥 곁에서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도겸은 그 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따져 보다가 손을 들어 답례했다. 손이 떨려서 답례가 어색했지만 노인은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는 얼굴이었다. 노인 뒤로 아낙들이 솥을 이고 줄지어 들어서며 하나같이 눈길을 땅에 두었다. 감사의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문을 닫아 두라고 한다. 성벽 밑에 천막이 쳐지고, 출가시킨 딸이 성 밖에 있다는 노파가 가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밤새 성벽 너머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올라온다.

VI · 빗장

도겸은 미축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두 번을 말해야 했다.

도겸“문을 닫아 두게. 열지 마라.”

미축“주공, 밖에 사람이…”

도겸“알아. 열지 마. 평원 군이 올 때까지 우리가 버텨야 하네. 지금 문을 열면 성이 흔들려.”

도상“성 밖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도겸“성벽 밑에 천막 칠 수 있는 만큼 쳐 주게. 물은 위에서 내려보내고…”

미축“밤이 되면 추위가 심합니다.”

도겸“알아…”

도겸의 말은 거기서 힘이 빠졌다. 그는 가마로 돌아가 앉았다. 성루를 내려오는 동안 한 번도 성 밖을 보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오자 안뜰에 성 안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문이 닫혔다는 소문이 벌써 퍼졌는지 한 노파가 가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노파“사군 나리, 우리 딸이 성 밖에 있어요. 출가시킨 애인데 어제 소식 끊기고…”

도겸“…이름이 뭔가.”

노파“봉이라고 합니다. 봉이.”

도겸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되풀이했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문을 열자고 말하면 그게 시작이 될 것 같았다. 하나를 들이면 저 사람들 모두를 들여야 한다. 그러면 성이 무너진다. 그는 자기 계산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하지 못한 채 가마 휘장을 내렸다.

밤이 되자 성벽 너머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아이 우는 소리와 수레바퀴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도겸은 그 소리를 이불 속에서 한동안 듣다가 베개에서 귀를 뗐다. 가슴께가 눌려 숨이 아팠다. 곁에서 도상이 졸고 있었다. 약사발은 식어서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아 있었다. 도겸은 그 막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 보다가 그만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미축에게 문을 열라고 한다. 평원 사람들과 성 밖 사람들이 함께 들어서고, 도상의 눈썹은 아래로 처진다. 도겸은 현덕이 서주를 맡길 사람인지 만나 봐야 안다고 말한다.

시점 3 / 3진궁조조 막하

VII · 목록

진궁은 조조 본진 곁의 작은 막사에서 목간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기 둘이 마주 앉아 마을 이름을 받아 적는 중이었다. 어젯밤까지 불탄 곳이 여섯, 오늘 새벽에 올라온 곳이 둘이었다. 이름은 받아 적을 때마다 한 줄씩 늘었다. 먹 갈던 서기가 졸다가 먹물을 엎질렀다.

서기“죄송합니다, 선생. 어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진궁“괜찮습니다. 새 목간을 쓰지요.”

서기는 목간을 갈아 놓고 다시 받아 적기 시작했다. 붓끝이 마르면 입김을 불어 가며 적었다. 진궁은 목간 위의 이름을 하나씩 눈으로 짚었다. 이름이 지명인지 사람 이름인지 구분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서주 사람들의 이름은 연주 사람들 이름과 말투가 미묘하게 달랐다. 진궁은 그 차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연주 땅에서라면 이름만 보고도 어느 현 사람인지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름 하나하나가 낯설었고, 그런 이름이 한 목간에 이렇게 쌓여 갔다.

그때 휘장이 걷히고 하후돈이 들어왔다. 갑옷에 아직 말 냄새가 배어 있었다. 뒤에 병사 셋이 손이 묶인 채 끌려 들어왔다.

하후돈“공대, 이 세 놈 봤소? 마을 우물가에서 아낙 옷을 벗겨 가려던 놈들이오. 내가 목을 치려고 했는데 막사에서 기다리라는 명이 왔소. 주공께 가서 허락받아 와 주시오.”

진궁“원양 장군이 직접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후돈은 거친 숨을 내쉬며 갑옷 어깨를 한 번 흔들었다. 칼자루를 쥔 손이 풀리지 않았다.

하후돈“주공이 나를 안 보시오. 이틀째요. 대장 앞에서 내가 올려야 할 말이 있는데, 만날 수가 없소.”

진궁은 대답을 늦추었다. 묶인 병사 하나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다. 얼굴에 겁이 있다기보다 자기가 왜 여기 묶여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앉아 있었다. 나머지 둘은 땅만 보았다. 하후돈이 한 걸음 다가섰다.

하후돈“이놈들 베지 않으면 군령이 없는 거요. 베면 칼을 거두자마자 제 병사 목부터 친다는 소문이 돌 거고… 어느 쪽이든 나는 할 말이 없소. 그러니 주공께서 정하시오.”

진궁“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말씀드리지요.”

진궁은 목간 하나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서기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진궁“목록은 제가 올 때까지 끊지 말고 적으십시오. 이름 앞에 날짜도 같이.”

서기“소속까지 적을까요.”

진궁“알면 적으십시오. 모르면 비워 두고요. 지어 쓰지는 마십시오.”

서기“예, 선생.”

VIII · 밤의 막사

조조는 본진 막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 지운 줄이 있는 군령 사본 하나, 식은 차 한 잔이 전부였다. 진궁이 휘장 안으로 들어서자 조조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조조“공대. 자네가 이 시각에 오는 걸 보니 일이 있군. 앉게. 차는 식었네만.”

진궁“원양 장군이 병사 셋을 잡아 두었습니다. 우물가 건입니다. 목을 칠지 말지 주공께 물어 달라 합니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소리가 작았다.

조조“원양이 날 안 만난다는 소린 안 하던가.”

진궁“만나고 싶어 하는 쪽은 장군이십니다.”

조조“그렇지. 내가 안 만나는 거네.”

조조가 웃으려다 말았다. 입꼬리가 반쯤 올라갔다 내려왔다. 촛불이 한 번 흔들렸고 막사 천에 비친 그림자가 따라 흔들렸다. 그는 사본 위의 지운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조조“공대, 자네는 내가 약해졌다고 생각하나.”

진궁“…”

조조“나는 어제 사수 가에 서서 물을 내려다봤네. 물이 맑더군. 그게 이상했어. 맑을 이유가 없었는데.”

진궁“주공…”

조조“아니, 아직 아닐세. 대답을 미루는군. 좋아. 그게 자네 대답이지. 내가 약해졌다고 소문이 돈다. 자네 귀에도 들어왔겠지. 쉽게 들었을 거야. 그럴듯한 소리니까.”

진궁“주공께서 줄을 지우신 이유는 제가 압니다.”

조조“아니, 모르네. 나도 모르는데.”

조조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차였다. 입을 찡그렸다.

조조“공대, 하나만 묻지. 자네는 아버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아나.”

진궁“뵌 적은 없습니다.”

조조“그렇겠지. 나도 잘 몰랐네. 그래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지.”

조조“아버님이 연주에 오시면 내 방 창부터 고쳐 드리려 했네. 바람이 드는 창이었어. 노인이 감기 걸린다고 순욱이 몇 번 말했는데도 그냥 뒀거든. 그런 것만 생각나. 이상하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조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효를 입에 올린 것도 아니었는데 낮아졌다. 진궁은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다. 같은 목소리로 조조가 아버님 얘기를 하던 날이 한 번 더 있었다. 그날은 아무도 그게 어떤 목소리인지 몰랐다.

조조“그 세 놈은 내일 아침까지 두게. 내일 정하겠네.”

진궁이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왔다. 막사 밖에서 전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전령은 진궁에게만 들리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전령“장 태수께서 보내셨습니다. 서찰입니다. 읽으시면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

진궁은 서찰을 받았다. 봉인이 장막의 것이었다. 봉니 모서리가 조금 깨져 있었다. 전령의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의 손이었다. 서찰의 무게가 가벼운 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그는 서찰을 소매 속에 넣고 막사 휘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불빛 안쪽에서 조조의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진궁의 선택

IX · 이름의 목록

진궁은 서찰을 읽지 않았다. 봉인도 떼지 않았다. 대신 서기들이 밤새 적은 목간을 두루마리로 묶었다. 불탄 마을 열한 곳, 곡식을 빼앗긴 집 마흔여 가구, 날짜와 병사의 소속까지 적혀 있었다. 이름 앞에 날짜를 같이 적으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날이 밝자 진궁은 두루마리를 들고 조조의 막사로 갔다. 조조는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진궁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펼쳤다.

조조“이게 뭔가.”

진궁“불탄 곳의 목록입니다. 읽으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조조“읽으라고. 내가 뭘 알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나.”

진궁“이 목록의 곡식은 열흘 안에 돌려줄 수 있습니다. 병사들이 먹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창고에 남은 것은 아직 많습니다. 소속과 날짜가 있으니 누가 어디서 가져갔는지 압니다. 그것을 돌려주고, 돌려준 병사에게는 상을 주시지요.”

조조는 한참 두루마리를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탁자를 두 번 두드리려다 멈췄다.

조조“상을 준다고. 훔친 놈에게.”

진궁“돌려주는 병사에게요. 돌려준 만큼 상을 내리시면 약해졌다는 소문은 다른 쪽으로 돌 겁니다.”

조조“어떤 쪽으로.”

진궁“제가 알아내겠습니다.”

조조는 대답하지 않고 두루마리의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중간에 한 이름에서 눈이 멈췄다. 어느 마을 이름이었다. 진궁이 봐도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었다. 조조는 거기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목간을 접었다.

조조“세 놈은 내가 직접 정하지. 곡식 건은 자네가 맡아. 하후돈과 의논해서.”

진궁은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왔다. 소매 속 서찰의 봉인은 그대로였다. 하루에 한 번씩 꺼내 보고 도로 넣었다. 열흘이 지났을 때도 봉인은 떼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그날 밤 장막의 서찰을 읽고 새벽에 말을 끌고 진영을 나선다. 보초가 막아서지만 창끝은 내려간다. 불탄 마을의 목록은 조조의 막사 탁자 위에 남는다.

IX · 떠나는 길

진궁은 서찰을 그날 밤 막사에서 읽었다. 장막의 글씨는 평소처럼 급하게 눌러 쓴 모양이었다. 몇 줄 안 됐다. 연주 안이 어지럽다는 것, 후방을 맡은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는 것, 돌아와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끝줄은 달랐다. 자네가 필요하네. 내가 말이 서툴러서 이 정도밖에 못 쓰네.

진궁은 서찰을 접어 촛불에 가져갔다가 도로 소매에 넣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 말을 끌고 나갔다. 짐이라고는 목간 몇 개와 갈아입을 옷 한 벌이 전부였다. 진영 외곽 말뚝 곁까지 왔을 때 보초가 창을 세웠다.

보초“공대 선생. 이 시각에 어디 가십니까.”

진궁“연주에 급한 일이 있습니다. 주공께는 아침에 알리지요.”

보초“허락 없이는 못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만…”

진궁“알고 있습니다.”

보초는 창을 내려놓지도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진궁은 고삐를 쥔 채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담담했다.

진궁“내가 가는 걸 막으면 주공께서 나중에 자네를 부르실 겁니다. 그때 무어라 아뢸지는 미리 생각해 두십시오. 나는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만.”

보초가 창끝을 땅에 내렸다. 진궁은 말 위에 올랐다. 고삐를 당기기 전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막사 하나의 불빛이 점처럼 남아 있었다. 거기가 조조의 막사인 줄은 알아볼 수 있었다. 불빛은 꺼지지 않을 듯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발굽 소리가 새벽 안개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서주 땅의 불탄 마을 열한 곳은 이 길에 없었다. 목록은 막사 탁자 위에 두고 왔다. 한 번은 읽혀야 한다고 생각해서 두고 온 것이었는데, 읽을지 안 읽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서찰의 봉인을 뜯지 않고 불탄 마을 열한 곳의 목록을 조조 앞에 펼친다. 조조는 한 이름에서 눈을 멈추고 세 놈은 직접 정하겠다고 말한다. 열흘이 지나도 봉인은 그대로다.

제2장 · 루트 r4

돌아가는 길

194년 가을 · 군이 되돌아가는 길에 먼지만 길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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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의 가을은 쌀이 익기도 전에 군량이 먼저 바닥을 보였다. 조조는 되돌아가는 길을 택했고, 대신 군령 한 장을 새로 써서 돌렸다. 한 집에서 한 말을 넘기지 말 것. 아이 있는 집은 건드리지 말 것. 서한 한 통이 닿은 집과 닿지 않은 집, 문을 열 사람과 닫을 사람, 곁에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이 같은 흙먼지 속에서 갈라선다.

시점 1 / 3진구오장

I · 서한

군이 서주를 돌아 나오는 길의 닷새째였다. 진구의 오는 팽성 서쪽 이웃 마을 어귀에서 선두 대열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마을 이름은 상리라고 했다. 길가 논에는 아직 덜 익은 벼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오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닷새 전 회군 명이 떨어질 때까지 떠들던 입들이 돌아가는 길에서는 닫혀 있었다. 이긴 군인지 진 군인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걸음만 규칙적으로 먼지를 일으켰다. 진구는 논을 볼 때마다 눈이 먼저 가서 한 마지기에 몇 말쯤 날지 헤아렸다. 헤아려서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버릇이 그랬다.

덕만이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소매를 끌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음 높았다.

덕만“오장님, 저기 저 집 보이시오. 외사촌 집 얘기하던 거기 아니오.”

진구“팽성이라고 했다. 여긴 상리다.”

덕만“내가 쓴 서한에 서쪽으로 가라고 쓰지 않았소. 팽성에서 서쪽으로 나오면 첫 마을이 여기요. 그 말대로 하면 저 집이오.”

진구는 걸음을 멈췄다. 앞에서 마을 사람 몇이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길가에 나와 서 있었다. 그중에서 낯익은 코가 보였다. 코가 크고 눈썹이 짧은 사내였다. 열 살쯤 어렸을 때 같이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외사촌 전보였다.

전보“구야. 정말 구냐.”

진구“형님. 서한 받으셨소.”

전보“받았지. 네가 글을 모르는데 글이 와서 누가 장난을 쳤나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있어서 일단 짐을 쌌다. 쌌더니 사흘 뒤에 팽성 쪽 마을이 탔다고 하더라.”

진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마디를 꺾을 자리인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덕만이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서한을 대신 써 준 것이 덕만이었다. 그 서한에는 진구가 부르는 대로 단 세 줄이 적혔다. 서쪽으로 가라, 짐은 가볍게 해라, 문은 잠그지 말고 가라. 진구는 글을 모르고 덕만은 서당 문턱을 밟아 본 사람이었다.

전보 뒤에서 아이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섯 살쯤 된 계집아이와 그보다 한 뼘 작은 사내아이였다. 계집아이는 진구의 창끝을 보더니 얼른 어른 다리 뒤로 숨었다. 사내아이는 반대로 한 걸음 나와서 진구의 신을 내려다봤다.

사내아이“아저씨 신이 새 신이오.”

진구“아니다. 풀로 묶은 헌 신이다.”

사내아이“풀로 묶은 거 오래 못 가요.”

진구는 웃으려다 그만두었다. 서주에 들어와 처음으로 같은 말을 두 번째 듣는 셈이었다. 불난 창고 앞의 아이가 같은 말을 했었다. 그 아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진구는 알 수 없었다.

II · 한 말

저녁에 대열이 상리에서 멈췄다. 해가 서쪽 산머리에 걸려 마을 지붕들이 붉은 기와처럼 물들었다.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는데, 피난 온 사람들이 군을 보고도 밥을 짓는 것이 진구에게는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군영을 마을 밖 논두렁에 치라는 명이 내려왔고, 뒤따라 새 군령이 오장들 앞에서 읽혔다. 읽는 사람은 백부장이었다. 얼굴이 이전보다 야위었고 목소리에 날이 서지 않았다.

백부장“군량이 열흘 치도 안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굶으면 군이 아니다. 그래서 거두라는 명이 났다. 단, 한 집에서 한 말을 넘기지 마라. 아이 있는 집은 건드리지 마라. 어길 때는 목이다. 이번에는 정말 목이다.”

막쇠“아이 있는 집은 빼면 거둘 데가 있기나 하겠소.”

백부장“웃기지 마라. 아이 없는 집이 이 마을에 몇 집 있다고 네가 아느냐. 알아내서 보고해라. 진 오장 네 오는 마을 서쪽 열 집을 맡는다.”

진구“…열 집, 말씀입니까.”

백부장“서쪽 끝에서 두 번째 집까지다. 첫 번째 집은 빼 줘라. 이름이 전이라 했지. 네 서한에 나온 집이라고 들었다. 서한 덕에 이 마을까지 와서 산 사람들이라 내가 눈감아 준다. 한 번만이다.”

진구는 허리를 굽혔다. 백부장이 첫 번째 집을 빼 준다는 말이 고맙기보다 무서웠다. 한 집을 빼 주는 일이 있으면 다른 열 집은 빼 주는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덕만“오장님, 열 집이오. 한 집에서 한 말이면 열 말이오. 서른 명 하루 양식밖에 안 되오.”

진구“셈은 내가 한다.”

덕만“셈이 좋으시니 말하는 거요. 이 마을 집들 하나같이 한 말 내놓으면 올겨울 못 넘기오.”

진구는 대꾸하지 않았다. 덕만 셈이 맞았다. 어느 집이든 겨울 앞의 한 말은 독 바닥이었다. 그 한 말이 군에게는 하루치 먹이밖에 안 되는데, 한 집에는 겨울 전부였다.

밤이 되자 진구는 오 사람을 데리고 마을 서쪽으로 갔다. 첫 번째 집 앞을 지나는데 전보가 문을 열고 나와 서 있었다. 문틈으로 아이들이 자는 것이 보였다. 전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구도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두 번째 집 앞에서 막쇠가 창끝으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자 아낙이 아기를 안고 서 있었다.

막쇠“오장님. 아이가 있소.”

진구“…안다.”

막쇠“군령에 아이 있는 집은 건드리지 말라 했소.”

진구는 아낙의 품에 안긴 아기를 한동안 내려다봤다. 아기는 자고 있었다. 입이 반쯤 벌어졌고 숨이 규칙적이었다. 백부장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돌았다. 이번에는 정말 목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따라왔다. 아이 있는 집을 빼면 거둘 데가 있기나 하냐는 막쇠의 비아냥이었다. 군령 안의 두 줄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진구의 선택

III · 한 말씩

진구는 아낙의 품에서 눈을 떼고 오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한 줄 접히는 소리가 났다.

덕만“오장님, 정말이오.”

진구“한 말이다. 한 말 이상은 받지 마라. 아이가 자고 있으면 소리 내지 마라. 문은 열린 채로 둬라.”

덕만이 아낙에게 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낙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 말들이 자루를 들고 나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아낙은 자루를 내밀며 처음으로 진구를 똑바로 봤다. 아무 원망도 담기지 않은 눈이어서 진구는 오히려 견디기 힘들었다.

아낙“군관 나리. 우리 집 올겨울은 이것으로 끝이오. 이게 마지막 한 말이오.”

진구“…받겠습니다.”

아낙“받으시오. 나리 잘못이 아닌 줄은 아오. 명이 그러니 그럴 테지.”

진구는 자루를 받아 덕만에게 넘겼다. 덕만이 자루를 수레에 얹을 때 아낙의 집 안에서 아기가 깨어 울기 시작했다. 아낙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진구는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렸다. 아기 우는 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듣고서야 다음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 집에서 열 말을 거뒀다. 한 말을 넘긴 집은 없었다. 막쇠는 수레를 끌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덕만은 마지막 집에서 문을 나서다가 돌아서서 문턱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절을 했다.

군영으로 돌아오자 백부장이 수레 위의 자루를 손으로 짚어 가며 셌다. 열 말이었다. 백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진구는 돌아서서 걸어 나왔다. 걸으면서 손가락 마디를 꺾으려 했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열 번을 해 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주먹을 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창과 칼을 내려놓고 군에는 한 말도 거둘 수 없다고 말하러 막사로 간다. 백부장은 열 대를 명하고 너 같은 놈이 오장이라 군이 이 모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말끝에 이상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III · 아이 곁

진구는 아낙의 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창을 땅에 눕혔다. 칼도 풀어서 창 위에 올렸다. 소리가 났다. 막쇠가 눈을 크게 떴다.

막쇠“오장님. 뭐 하시는 거요.”

진구“이 집은 건드리지 않는다. 아기가 자고 있다.”

막쇠“군령에 한 말은 받으라고 했소. 아이 있는 집만 뺀다 했지 아이가 자는 집을 뺀다는 소리는 아니었소.”

진구“아이 있는 집을 뺀다고 했다. 여기가 그 집이다.”

막쇠“그럼 거둘 데가 없소. 그건 오장님도 알잖소.”

진구“알아. 그러니까 내가 백부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 이 마을에서 한 말은 거둘 수 없다고.”

덕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입술이 마른 얼굴이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만“오장님이 가시면 열 대로 안 끝나오. 이번엔 목이라 했소.”

진구“그래서 내가 간다. 너희는 남아라. 한 말도 받지 마. 내가 갔다 올 때까지.”

진구는 칼을 두고 창만 집어 들었다. 발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나온 첫 집 문틈에서 아이 하나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를 보고 있었다. 사내아이였다. 신 이야기를 하던 그 아이였다. 아이는 진구를 향해 작은 손을 한 번 흔들었다. 흔들고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진구는 그제야 걸음을 뗐다. 군영으로 가는 길은 짧았다. 가는 동안 진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는 것은 셈뿐이었다. 한 말, 열 집, 열 말, 서른 명, 하루. 그 셈이 앞으로 걸어가는 발걸음 하나마다 불어나고 줄어들었다.

백부장은 막사 앞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진구가 앞에 서자 백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백부장“칼은 어디 있느냐.”

진구“두고 왔습니다. 마을 서쪽 열 집, 한 말도 못 거두겠습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백부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모닥불이 탁 하고 터졌다. 그는 장작 하나를 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부장“너 같은 놈이 오장 노릇을 하니 군이 이 모양이다. 내일 점고 때 나와라. 열 대다.”

진구“예.”

백부장“그리고 내일 아침 한 말은 내 이름으로 받아 오겠다. 네 이름 말고. 알겠냐.”

진구는 고개를 들었다. 백부장은 불만 보고 있었다. 더 묻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명대로 열 집에서 한 말씩 거둔다. 아낙은 이게 올겨울 마지막 한 말이라고 말하고, 덕만은 빈 문턱에 혼자 절을 한다. 그날 밤 진구는 손가락 마디를 꺾으려 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시점 2 / 3도겸서주목

IV · 담성

도겸이 담성으로 옮겨 온 지 열흘이 지났다. 병은 낫지도 깊어지지도 않은 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창밖으로는 흙먼지가 날마다 서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조조의 군이 물러가고 있다는 것을 도겸은 먼지의 방향으로 알았다.

도상이 약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발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도상“아버님, 오늘은 조금 드셔 보십시오. 의원이 어제보다 안색이 좋다고 했습니다.”

도겸“안색은 의원이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보는 것인데… 거울 좀 가져와 보거라.”

도상“…거울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겸“그래. 그럴 줄 알았다.”

도겸은 웃었다. 웃음 끝이 기침으로 변했다. 도상이 등을 쓸었다. 쓸어 주는 손길은 서투르고 조심스러웠다. 도겸은 손을 들어 아들의 손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미축이 문턱에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번져 있었다.

미축“주공, 평원상 유현덕이 담성 남문 밖에 도착했습니다. 군은 삼천 명이 못 되고, 병마보다 부상병이 많습니다. 조조가 물러가는 것을 보고 곧바로 달려온 모양입니다.”

도겸“현덕이… 왔구나.”

도상“아버님은 현덕을 아십니까.”

도겸“만나 본 적은 없다. 이름은 들었지. 탁군에서 짚신 삼던 사람이 평원상이 됐다고 하더구나. 처음엔 우스개인 줄 알았다.”

도상“지금은요.”

도겸“지금은 조조 군이 물러가는 날 아무것도 없이 달려온 사람이라는 것만 안다. 그게 우스개가 아니라는 것도.”

도겸은 현덕이 새벽에 곧바로 군을 냈다는 보고를 새삼 되짚었다. 그렇게 서둘러 온 걸음이 조조의 칼을 거두게 한 한 가닥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살이 크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빚의 일부는 저 지친 군에 있었다.

도겸은 현덕이 하루를 묵고 군을 냈다는 보고를 새삼 되짚었다. 하루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늦게 떠난 이가 쉬지 않고 달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 늦음과 그 달음질을 한 사람의 몫으로 같이 셈해야 한다는 것이 도겸에게는 낯설었다.

미축“성 안으로 맞으시겠습니까.”

도겸“조조는 진짜 물러간 건가.”

미축“척후 보고로는 서쪽 이십 리 밖에서 주둔을 풀고 행군 중이라 합니다. 군량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도겸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이 따뜻하게 젖는 것을 느꼈지만 닦지 않았다. 눈을 감자 창밖 먼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수레바퀴 소리가 일정한 장단으로 섞여 서쪽으로 흘러가는 소리였다. 저 소리 아래에 불탄 마을들이 놓여 있었다. 눈을 뜨자 도상이 숨죽이고 있었다.

도겸“상아. 네가 보기에 내 아들들은 서주를 맡을 수 있겠느냐.”

도상“아버님…”

도겸“대답을 미루지 마라. 네 얼굴에 다 쓰여 있다.”

도상은 입을 열기 전에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지 않게 하려는 듯했다.

도상“…제가 맡으면 적어도 한 해는 버틸 겁니다.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도겸“그것이 정직한 대답이구나. …주목 노릇엔 별 도움이 안 되겠다만.”

도상은 고개를 숙였다. 눈썹이 밑으로 처졌다. 도겸은 그 눈썹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V · 두 갈래 문

오후에 도겸은 다시 가마를 타고 남문 성루에 올랐다. 이번에는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도상도 미축도 말없이 가마 곁을 따랐다. 올라가서 서서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문 앞에는 평원에서 온 군이 초췌한 대열로 서 있었고, 한 사내가 그 맨 앞에서 말 위에 앉은 채 성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가 길고 팔이 길다는 소문 그대로의 사내였다. 도겸은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다.

미축“저분이 유 평원상이십니다.”

도겸“알아. 말 안 해도 안다.”

도상“아버님, 열자는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도겸“아직 모르겠다. 열면 서주가 저 사람 손에 넘어갈 것 같고, 닫으면 서주가 우리 손에서 말라 죽을 것 같다.”

미축“조조가 돌아가는 길에 마을에서 곡식을 거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한 집에 한 말이라는 제한 군령이 났다고 합니다.”

도겸“한 말이라고. 꽤 얌전해졌구나.”

미축“예.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겨울을 걱정합니다. 피난민 수천이 아직 성 안팎에 있고, 군량은 남은 것이 보름치입니다.”

도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 아래 군을 한 번 훑었다. 병사들은 투구를 벗어 팔에 끼고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얼굴들이 햇볕에 그을려 검었고, 몇몇은 서로 어깨를 빌려 서 있었다. 평원 군도 먹을 것이 없어 보였다. 깃발이 힘없이 처졌고 말들이 야위었다. 그럼에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도겸은 그 질서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기 휘하의 병사들은 배가 고프면 대열부터 흩어졌다. 담성 안에서도 이미 몇이 밤에 성을 넘어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겸은 성 아래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 아래 사내가 말에서 내려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두 손을 모아 위를 향해 절을 했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절 하나가 담성 문 앞에 서 있던 수천 사람의 숨을 한 번에 멈추게 했다.

도겸“내가 저 절 하나 받자고 병든 몸을 끌고 이 성루까지 올라온 건 아니겠지.”

미축“…주공.”

도겸“자중. 자네는 알고 있었지. 내 마음이 어디로 기운 줄.”

미축“짐작은 했습니다.”

미축“주공께서 따로 말씀 안 하셔도 알고 있었습니다. 현덕이 왔다는 소식에 주공의 기침이 멎었으니까요.”

도겸“허, 그랬던가. 몰랐네.”

도겸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자기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알았다. 알고 나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손끝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성 아래 바람이 한 번 불어 올라왔다. 도상이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

도겸의 선택

VI · 열리는 길

도겸은 미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갈라질까 봐 말하는 대신 손짓을 했다. 미축이 몸을 돌려 성루 아래로 신호를 보냈다. 빗장이 천천히 올라가는 소리가 성루까지 올라왔다.

도상“아버님, 정말이십니까.”

도겸“정말이다. 현덕에게 문을 열고, 그의 군에게 쌀 한 되라도 먼저 나눠 주어라. 밖에 서 있는 피난민도 함께 들이게. 성 안에 쌀이 보름치라면 서로 나누면 열이틀이 된다.”

도상“열이틀이 지나면…”

도겸“열이틀 안에 조조는 연주로 돌아간다.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도상은 아버지를 오래 쳐다봤다. 그러다 한숨 같은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은 아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원망이 아닌 다른 것을 보았다. 알아듣는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자 평원 군이 한 줄로 들어섰다. 그들은 걸음이 느렸고 눈은 지쳐 있었다. 선두의 사내가 말에서 내려 성루 쪽을 올려다봤다. 도겸은 손을 들어 보였다. 사내가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이번에는 고개도 같이 숙였다.

도겸은 성루를 내려와 문 안쪽에서 그를 맞았다. 가마에서 내리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사내는 기다렸다. 두 사람이 마주 섰을 때 도겸은 손을 내밀었다. 사내의 손은 거칠고 차가웠다. 짚신 삼는 손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유비“주목 어른. 몸이 편치 않으시다 들었습니다.”

도겸“편치 않지. 그래도 이 나이에 자네를 만나려고 이렇게 서 있네.”

유비“제가 감당할 일이 아닌 줄 압니다. 그저 구하러 온 사람으로만 남게 해 주십시오.”

도겸“서주를 구한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오늘은 말하지 않겠네. 먼저 먹고 쉬게. 얘기는 길어질 걸세.”

도겸은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한 번도 흐리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병이 깊어 만나지 못한다고 전하게 하고 문을 그대로 닫아 둔다. 도상은 안심한 얼굴이 되고, 성벽 밑에는 평원 군의 불빛이 하나씩 켜진다. 도겸은 끝내 사람을 다시 보내지 않는다.

VI · 닫힌 성

도겸은 가마 휘장 사이로 성 아래를 한 번 더 내려다보고 손을 들었다. 손이 힘없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도겸“자중. 문은 그대로 닫아 두게. 평원상에게는 사람을 보내 내가 병이 깊어 만나지 못하는 뜻을 전하게.”

미축“주공, 평원상은 구원하러 온 사람입니다.”

도겸“아네. 그러니 더욱 미안하지. 하지만 성을 연다는 건 나 혼자의 일이 아니네. 병든 늙은이가 한마디 하면 서주가 넘어가는 일이 되는 걸세. 그러면 안 돼. 아직은…”

미축“…주공이 그리 정하신다면.”

도겸“정한 게 아니네. 못 정한 거네. 못 정한 채로 닫아 두는 거야.”

미축은 고개를 숙이고 성루를 내려갔다. 도상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눈썹은 처지지 않았다. 입술을 꼭 문 얼굴이었다.

도상“아버님. 닫으신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제가 있으니까요.”

도겸“그래. 네가 있다.”

그 말에 도상의 얼굴이 풀렸다. 풀린 얼굴을 보며 도겸은 소매 속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쥐었다. 아들의 얼굴을 풀어 준 것은 닫힌 문이 아니라 아직 넘어가지 않은 아버지의 자리였다.

저녁에 성벽 아래에서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평원 군이 야영을 시작한 불빛이었다. 담성 안쪽에서도 불빛이 켜졌다. 두 불빛은 성벽을 사이에 두고 한참 마주 보았다.

미축이 돌아와 보고했다.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 있었다.

미축“평원상이 전하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지 않으셔도 성벽 밑에서 사흘을 머물겠다고 합니다. 먹을 것은 가져온 것으로 충분하다고…”

도겸“거짓말이네. 먹을 것이 없어 보였어.”

미축“예. 그래도 그렇게 말하라 했습니다.”

도겸은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 성벽 너머 불빛이 감은 눈꺼풀 안에서도 어른거렸다. 그는 끝내 사람을 다시 보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도겸은 현덕에게 문을 열라고 한다. 성 안의 쌀은 보름치이지만 나누면 열이틀이 된다. 문 안쪽에서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도겸은 이번에는 말끝을 흐리지 않는다.

시점 3 / 3진궁조조 막하

VII · 돌아가는 군

조조의 군이 서주를 돌아 나오는 길의 일곱째 날이었다. 진궁은 말 위에서 본진 행렬의 맨 앞을 따랐다. 앞서가는 조조의 등이 먼지에 가려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말 위의 어깨가 이전보다 좁아 보였다. 진궁은 그 어깨가 정말 좁아졌는지 자기 눈이 달라졌는지 가늠하려 애썼다.

하후돈이 말을 붙여 왔다. 투구 아래의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검붉었다.

하후돈“공대. 자네 목록은 어떻게 됐소. 곡식 돌려주는 일.”

진궁“반은 돌려줬습니다. 나머지 반은 이미 병사들 배 속입니다.”

하후돈“반이면 대단하오. 나는 한 톨도 못 돌려받을 줄 알았소.”

진궁“돌려준 병사에게 상을 줬더니 의외로 줄을 섰습니다. 상 얘기가 퍼지긴 퍼졌나 봅니다.”

하후돈“이득이 아니라 겁이오. 주공이 칼을 거두긴 했어도 얼굴을 알아보는 눈은 그대로니까.”

진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이든 겁이든 곡식이 돌아가는 것은 같다고 그는 속으로 덧붙였다. 하후돈이 말머리를 돌리려다 멈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하후돈“공대. 주공이 이상하오. 서주 땅을 벗어나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소.”

진궁“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시지요.”

하후돈“아니오.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오. 늘 돌아보셨소.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는 거요.”

저녁에 행렬이 멈추었다. 진궁은 조조의 막사로 불려 갔다. 조조는 지도를 펼쳐 놓고 앉아 있었지만 눈은 지도 위에 머물지 않았다. 탁자 위에 서찰이 한 통 놓여 있었다. 봉인이 이미 뜯겨 있었다.

조조“공대. 앉게. 읽어 보게.”

진궁“제가 읽어도 되는 글입니까.”

조조“읽으라고 했네.”

진궁은 서찰을 집어 읽었다. 순욱의 글씨였다. 연주 안이 불안하니 속히 돌아와 주십시오. 장막과 진궁의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후방에서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 짧게 들어 있었다. 진궁은 서찰을 접으며 얼굴색이 변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조조“읽었나.”

진궁“읽었습니다.”

조조“자네 눈에는 이 글이 무엇으로 보이나.”

진궁“경고로 보입니다.”

조조“나는 보고로 보이네. 그런데 둘 다 같은 말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연주의 일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지네. 내가 서주에서 사람을 죽이는 동안 연주에서 누가 칼을 갈고 있다는 거지.”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이번에는 소리가 컸다.

조조“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서주를 다시 칠 걸세. 도겸이 죽든 말든. 아버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네.”

진궁은 대답을 아꼈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이 섞일 것 같았다. 막사 밖에서 말이 한 번 울었고 보초가 무언가를 낮게 일렀다. 조조의 목소리가 효를 말할 때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낮은 목소리가 오늘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아래 무엇이 새로 가득 차 있었다. 복수가 이전처럼 날카롭지 않은 대신 시커멓게 퍼져 있었다.

VIII · 마지막 막사

행렬이 연주 땅이 보이는 언덕 위에서 쉬었다. 진궁은 밤이 깊도록 막사 밖에서 서성였다. 하늘에 별이 많았다. 서주의 불타던 하늘과 사뭇 다른 별이었다. 소매 속에서 서찰이 하나 만져졌다. 봉인을 뜯지 않은 장막의 서찰이었다. 열흘째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지만, 열흘째 소매에서 꺼내 만지고 도로 넣었다.

등 뒤에서 순욱의 부하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발소리가 없어서 말이 먼저 닿았다.

전령“선생. 주공이 부르십니다. 지금 즉시.”

진궁“무슨 일입니까.”

전령“모르겠습니다. 다만 하후 장군도 이미 들어가셨습니다.”

진궁은 막사 휘장을 걷고 들어갔다. 조조가 상 앞에 앉아 있고 하후돈이 곁에 서 있었다. 상 위에 목간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조조가 그 목간을 진궁 쪽으로 밀었다.

조조“읽어 보게.”

진궁“…장막의 이름이 들어 있군요.”

조조“그렇네. 자네 고향 친구 이름이지. 그 이름이 들어 있다는 건 연주에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고, 자네가 그 일을 사전에 알았는지 몰랐는지 내가 묻는 건 아니네. 묻는 건 하나뿐일세.”

진궁“말씀하십시오.”

조조“자네 소매 속의 서찰을 읽었는가.”

진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하후돈의 손이 칼자루에 얹혔다. 막사 안의 숨소리가 한 사람 몫으로 줄었다. 진궁은 서찰을 소매에서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봉인이 그대로였다.

진궁“읽지 않았습니다. 열흘 동안 열지 않았고, 오늘 열어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조조“열게.”

진궁“여기서요.”

조조“여기서. 내 앞에서. 자네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걸 하후돈이 보게.”

진궁은 봉인을 뜯었다. 밀랍 조각이 상 위로 떨어졌다. 서찰은 짧았다. 장막이 진궁에게 연주로 돌아와 달라는 글이었다. 자네가 필요하네. 내가 말이 서툴러서 이 정도밖에 못 쓰네. 진궁은 소리 내어 읽지 않고 서찰을 조조 쪽으로 밀었다. 조조는 눈으로 읽었다. 읽는 동안 얼굴에 아무 표정이 지나가지 않았다.

조조“공대. 자네는 내 편인가, 장막의 편인가.”

진궁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두 이름 모두 대답이 될 수 있었고 두 이름 모두 거짓이 될 수 있었다. 곁에 남아 간하는 길과, 이 막사를 나가 연주로 말을 달리는 길.

진궁의 선택

IX · 곁에 남는 이유

진궁은 서찰을 집어 촛불에 가져갔다. 종이 끝이 말려 들어가며 불이 붙었다. 조조는 그 광경을 한마디 없이 지켜보았다. 하후돈의 손이 칼자루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진궁“주공. 장막은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연주에 닿는 대로 먼저 가서 설득하겠습니다. 칼을 쓰는 건 그다음에 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조조“설득이라.”

진궁“예. 장막은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 의심을 받으면 오히려 굳어집니다. 제가 가서 말하겠습니다. 제가 주공 곁에 있는 이유를.”

조조“이유가 있기는 한가.”

진궁은 서찰이 다 타서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재는 상 위에 한 줌으로 쌓이다 입김에 흩어졌다. 그가 가만히 말했다.

진궁“주공께서 서주를 칠 때 칼을 거두신 것을 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면 다시 칼을 드실 때 누가 곁에서 이유를 여쭈어도 들으실 겁니다. 그 이유가 옳은지 그른지 저는 곁에서 말하겠습니다.”

조조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탁자를 두 번 두드리려다 멈췄다. 그는 입꼬리를 반쯤 올렸다가 내렸다.

조조“공대. 자네는 말이 참 많군.”

진궁“예. 그게 제 쓸모입니다.”

하후돈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조조는 손짓으로 두 사람을 물렸다. 막사를 나오자 별이 여전히 많았다. 진궁은 하후돈과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후돈“공대. 자네 아주 큰 도박을 했소.”

진궁“도박이 아닙니다. 그냥 남았을 뿐입니다.”

하후돈“그게 도박이오. 주공 앞에서 그 서찰을 태운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오.”

진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만졌다. 소매가 가벼웠다. 서찰이 없는 소매가 이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서찰을 상 위에 두고 연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하후돈이 칼자루를 잡지만 조조가 손을 들어 막는다. 하후돈은 칼은 안 뽑았지만 다음엔 뽑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궁은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린다.

IX · 말머리

진궁은 서찰을 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일어서서 조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진궁“주공. 저는 제 친구를 의심하지 않으렵니다. 그 친구가 틀렸다면 그것을 확인하는 것도 제가 할 일이고요. 먼저 가겠습니다.”

조조“가겠다고.”

진궁“예. 연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후돈이 칼자루를 잡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조조가 손을 들어 막았다. 조조는 진궁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불꽃이 한 번 흔들렸다.

조조“공대. 자네는 나를 몇 번 구했나.”

진궁“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조조“나도 세어 보지 않았네. 그런데 오늘은 세어 보고 싶군. 가게. 가는 길에 하후돈이 부르면 서서 들어 주게.”

진궁은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이전과 다른 절이었다. 막사를 나오자 하후돈이 뒤따라 나왔다.

하후돈“공대. 칼은 안 뽑았소. 주공 말씀 때문이오. 다음엔 뽑을 것이오.”

진궁“알고 있습니다, 원양 장군.”

하후돈“알면서 왜 가는 거요.”

진궁“장막이 저를 부른 글씨를 장군도 보셨지 않습니까.”

하후돈은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진궁은 말을 끌고 진영 외곽까지 걸었다. 새벽안개가 발목을 적셨다. 말 위에 오르기 전에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조조의 막사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은 점처럼 작았는데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장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아직 이름이 오르지 않은 한 사내가 연주 땅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내의 이름을 진궁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올리면 길이 돌이킬 수 없게 굳을 것 같았다. 말은 먼저 걸음을 떼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궁은 장막의 서찰을 촛불에 태우고 조조 곁에 남는다. 연주에 닿으면 장막을 직접 설득하겠다고 말하자 조조는 자네는 말이 참 많다고 한다. 서찰이 없는 소매가 가볍다.

제3장 · 루트 T1

남은 자

194년 가을 ~ 겨울 ·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문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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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뒤집혔다는 소식이 서주 땅까지 내려왔을 때, 조조 곁에는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목록을 적는 문관 하나, 칼을 쥔 장수 몇, 그리고 명령대로 사수 가에 섰던 병사 하나. 그 가을 서주에서는 병든 노인이 마지막으로 문 하나를 열어 보이려 하고 있었다.

시점 1 / 3조조연주목

I · 남은 자리

서주에서 돌아오는 길은 냄새가 먼저 따라붙었다. 조조는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부는지 따지지 않으려고 군막 입구를 한 폭 더 내렸다. 사수 얘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령을 비켜 가다 매를 맞은 오장 몇의 이름이 보고 끝에 붙어 돌아왔다. 조조는 그 이름 옆에 붓으로 점을 하나씩 찍었다. 왜 찍는지는 자기도 몰랐다.

칼을 거둔다던 군령이 돌아오는 길에서도 제 구실을 못 했다는 보고였다. 지나온 마을마다 곳간이 비었고, 병사들은 그것이 주공의 뜻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조조는 그 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묻지 않았다.

서주는 피 한 방울 덜 흘린 채 등 뒤로 멀어졌다. 보고서가 얇아서 막사가 오히려 휑했다. 조조는 비어 있는 곳이 무엇인지 헤아리다가 그만두었다.

군막 한가운데 화로가 있었는데 불이 시원치 않았다. 하후돈이 부지깽이로 숯을 뒤집다가 재만 날렸다. 진궁은 화로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아 목간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오는 길 내내 그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조조“공대, 자네는 춥지 않나. 거기까지 불기가 가겠나.”

진궁“괜찮습니다. 손이 시리면 붓이 잘 움직입니다.”

조조“희한한 소리를 하는군. 손이 시리면 글자가 뭉개지지.”

진궁“뭉개지면 다시 씁니다. 목간은 많으니까요.”

하후돈이 부지깽이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숯이 한 덩이 튀어 화로 밖으로 굴렀다. 그는 발로 그걸 눌러 끄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후돈“주공, 파발이 왔습니다. 장막이 여포를 받아들였다는 건 이제 소문이 아닙니다. 복양에 깃발이 올랐답니다.”

조조는 탁자를 두 번 쳤다. 두 번에서 멈추지 못하고 한 번 더 쳤다. 세 번째 소리가 막사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조조“맹탁(孟卓)이라. 그 사람 내 혼삿날에도 왔었는데.”

진궁“오셨지요. 선물로 비단 한 필을 가져오셨고, 주공께서 그걸 너무 곱다고 처마 밑에 걸어 두셨습니다.”

조조는 진궁을 한참 보았다. 진궁은 목간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붓끝이 마르려 하자 입김을 불어 적시고 계속 써 내려갔다.

조조“공대. 자네와 맹탁은 같은 동군 사람이지.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진궁“예, 같은 우물을 썼습니다.”

조조“그런데 자네는 여기 있고.”

진궁“여기 있습니다.”

조조는 더 묻지 않았다. 하후돈이 헛기침을 하더니 화로 옆으로 돌아가 새 숯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하후돈이 두 손을 비비며 옆으로 다가앉았다. 물어볼 것이 있는 얼굴인데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후돈“주공,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공대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맹탁과 한 우물을 먹었다고 하던데요.”

조조“그랬지.”

하후돈“그럼 공대가 우리 편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압니까. 같은 우물이면 같은 물맛인데.”

조조“원양, 자네는 묻는 방식이 거칠어서 늘 정직하군. 나도 모르네. 모르니까 옆에 앉혀 둔 게야.”

진궁이 목간 위에서 붓을 멈추었다. 그러나 고개는 들지 않았다.

잠시 뒤 휘장이 걷히고 전령이 들어와 서신 한 통을 놓고 나갔다. 정욱의 글씨였다. 견성은 버티고 있으나 성 안에 소금이 떨어졌다고 했고, 끝에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사람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조조“읽어 보게, 원양. 나는 눈이 침침해서.”

하후돈“소금이 없다 합니다. 사람은 문을 안 열었고요. 이 사람 글은 꼭 곳간지기 셈 같습니다.”

조조“정욱다운 글이지. 사람 걱정이 소금 걱정 뒤에 오는 사람이니.”

그 말에 진궁이 붓을 놓았다. 아주 작게 소리가 났다. 조조는 못 들은 척 서신을 접어 소매에 넣었다.

II · 강 건너기 전

군은 이튿날 물가에서 멈췄다. 얼음이 얇게 낀 작은 내였는데 건너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고 했다. 조조는 말에서 내려 혼자 물가를 따라 걸었다. 진궁이 따라왔다.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올 것을 조조는 알고 있었다.

조조“목록은 어디까지 적었나.”

진궁“팽성 동쪽까지입니다. 이름을 아는 만큼만요. 모르는 데는 빈칸으로 두었습니다.”

조조“빈칸이 많겠군.”

진궁“예.”

조조“몇 줄이나.”

진궁“세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조조는 걸음을 멈췄다. 발밑에서 얼음 조각이 부서졌다. 그는 물을 내려다보며 한참 말이 없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조“아버님을 모시던 노복이 있었네.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도 아버님 신발을 직접 닦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마지막에 어디 있었는지 아나. 수레 뒤였다네. 앞이 아니라 뒤에서 걷고 있었어.”

진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조는 소매 속에서 손을 꺼내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조조“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갔네. 효라는 말만으로 간 게 아니야. 알아듣겠나.”

진궁“알아듣겠습니다.”

조조“알아듣겠다는 대답이 제일 싫구먼. 알아듣는 사람은 꼭 한 마디를 더 하니까.”

진궁“…주공, 한 마디는 아닙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 노복의 이름을 아십니까.”

조조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얼음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멀리서 병사들이 소를 몰아 내를 건너고 있었다. 소 울음소리가 길게 늘어났다.

조조“…모르네. 평생 영감이라고만 불렀어.”

진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보태지 않았다. 조조는 오래 기다렸으나 진궁의 입에서 한 마디가 더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도 화가 가라앉았다. 대신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그는 말고삐를 다시 쥐고 돌아섰다. 진궁이 두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다.

둑 아래 얼음 틈으로 마른 갈대 한 줄기가 삐져나와 있었다. 조조는 그것을 발끝으로 눌러 보았다. 뿌리가 얼어붙은 흙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궁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모른 척 목간 끈을 고쳐 맸다.

군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사 하나가 둑 아래서 올라오다 길을 비켜섰다. 물을 길러 갔다 온 모양인데 두레박에서 물이 흘러 신발이 젖어 있었다. 병사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조조는 그 신발 끈을 보았다. 짚신 끈이 군인 매듭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조조“이름이 뭔가.”

병사“…황 가입니다.”

조조“황 가 뭐. 이름이 있을 것 아닌가.”

병사“소인은… 그냥 황 가로 불립니다, 주공.”

조조는 더 캐지 않았다. 병사는 두레박을 안고 서둘러 둑을 올라갔다. 진궁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다 목간 한 장을 소매에서 꺼냈다. 황 가라고 한 줄 썼다. 그 아래는 비워 두었다. 조조는 그것을 보고 먼저 말에 올랐다.

조조의 선택

III · 되감은 목간

조조가 남쪽 길을 가리킨 것은 해가 뜨기 전이었다. 하후돈이 눈을 크게 떴으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군은 도로 짐을 묶기 시작했다. 군량 수레가 방향을 틀 때 바퀴가 진흙에서 빠지는 소리가 났다.

진궁은 막사 한구석에서 목간을 말았다. 팽성 동쪽까지 적은 이름들이었다. 끈을 감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조조가 들어왔다가 그 손을 보았다.

조조“뭘 그리 오래 묶나.”

진궁“풀어지면 안 되니까요. 다음 것은 새로 쓰겠습니다. 이 목간 뒤에 이어 쓰지는 않겠습니다.”

조조“이어 쓰면 되지 않나. 목간이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궁“아깝습니다. 그래도 이어 쓰지 않겠습니다.”

조조는 대꾸하려다 말았다. 진궁의 대답 속에 반항은 없었다. 짐을 챙기는 소리 같았다. 그는 탁자 위 군령서에 인을 눌렀다. 찍힌 붉은 자국이 번져서 한쪽 모서리가 흐렸다.

조조“공대는 따라올 건가.”

진궁“따라갑니다. 목록을 적어야 하니까요.”

조조“적을 게 또 생길 텐데.”

진궁“예, 생기겠지요.”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군이 떠날 채비를 마칠 무렵 진궁은 가장 뒤쪽 수레에 올라탔다. 수레 안에는 목간 상자와 붓통, 먹 하나가 있었다. 먹은 갈아 쓰다 보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진궁은 그 반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내려다보았다.

바깥에서 하후돈이 병사들을 세우는 소리가 났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수를 세는 소리였다. 일 오, 이 오, 삼 오. 조조는 군막 입구에 서서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줄이 길어질수록 소리가 짧아졌다.

조조“공대. 자네는 나보다 늦게 따라와도 된다.”

진궁“아닙니다. 지나간 마을 이름을 받아 적으려면 뒤에 붙어 가야 합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점심 뒤에 서쪽을 가리킨다. 연주가 불에 탄다며 방향만 틀고, 진궁은 서주 쪽 목록을 팽성 동쪽에서 끊겠다고 말한다.

III · 서쪽 길의 목간

조조가 서쪽을 가리킨 것은 점심을 먹은 뒤였다.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았다. 하후돈만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놓았다. 군은 도로 짐을 풀지도 않고 방향만 틀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으나 금방 잦아들었다.

하후돈“주공, 서주 쪽에서 저자들이 또 올지 모릅니다.”

조조“오면 그때 보세. 연주가 불에 타는 중이야. 이쪽부터 끄고.”

하후돈“…알겠습니다.”

진궁이 수레 옆에서 말을 몰아 조조에게 붙었다. 목간 상자는 안장에 매어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그는 한 손을 상자에 올려놓고 있었다.

진궁“주공. 서주 쪽 목록은 여기서 끊겠습니다.”

조조“끊는다고?”

진궁“예, 팽성 동쪽까지로 하겠습니다. 이후는 쓰지 못한 걸로요. 쓰지 못한 것과 쓰지 않은 것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조조는 한동안 말 위에서 흔들렸다. 서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마른 볏짚 냄새가 났다.

조조“공대, 자네는 가끔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말을 정확하게 하는군.”

진궁“곤란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조조는 그 말을 곱씹느라 말고삐를 놓칠 뻔했다. 하후돈이 앞에서 외쳤다. 서쪽 길 끝에 연기가 올랐다. 이번에는 서주 쪽이 아니라 연주 쪽 연기였다.

조조는 연기를 오래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진궁 쪽으로 몸을 틀었다.

조조“공대. 자네, 이쪽으로 같이 가 주어서 고맙네.”

진궁“가는 길이 같아서요.”

조조“같은 길이라면 다행이지. 연주에 닿을 때까지는 그러세.”

진궁은 대답 대신 말머리를 조금 돌려 조조 곁에 나란히 섰다. 목간 상자가 안장 옆에서 덜컥거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해가 뜨기 전에 남쪽 길을 가리킨다. 하후돈은 이의를 달지 못하고, 진궁은 목간 뒤에 이어 쓰지 않겠다며 끈을 느리게 감는다.

시점 2 / 3유비소패 주둔

IV · 병상 곁의 말

서주에서 올라오는 소문은 사수 얘기로 시작해서 사수 얘기로 끝났다. 유비는 소문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서 손을 들어 말렸다. 끝까지 들으면 걸어 들어갈 수 없는 길이었다.

소문 속에는 군령을 어기고 사람을 빼냈다는 조조군 오장들 얘기가 섞여 있었다. 유비는 그 대목에서 한 번 눈을 감았다. 이름은 묻지 않았다.

약탈과 불 얘기가 소문의 반을 채웠다. 조조가 칼을 거뒀다는데도 곳간이 탔다고 했다. 유비는 누가 불을 질렀는지 묻지 않고 곳간이 몇 채 남았는지부터 물었다.

소문은 짧았다. 조조군이 물러갔다는 얘기가 전부였다. 유비는 물러간 군이 무엇을 두고 갔는지, 오히려 그게 궁금했다.

평원성 문을 새벽에 나선 지 반년이 흘렀다. 빌려 쓴 군사의 값은 갚을 길이 없었고, 도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값이 한 푼씩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평원성 문을 해가 중천에 오른 뒤에 나선 날을 유비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다는 말을 도겸 쪽 사람들은 다시 꺼내지 않았는데, 꺼내지 않는 쪽이 오히려 무거웠다.

담성 안채에는 약 달이는 냄새가 문틈마다 배어 있었다. 도겸은 베개를 높이 괴고 누워서 눈을 뜨고 있었는데, 시선이 자꾸 천장으로 미끄러졌다. 미축이 문 곁에 서 있고 진등은 침상 발치에 앉았다. 유비는 침상 가까이에 무릎을 꿇었다.

도겸“현덕, 오셨구려. 와 줘서 고맙소.”

유비“누워 계십시오, 어르신. 말씀은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도겸“천천히 하면 내가 중간에 까먹소. 어제는 둘째 이름이 생각 안 나서 한참 앉아 있었소. 상(商)이던가, 응(應)이던가.”

도겸“지난봄에 내가 비친 말, 기억하시오. 서주를 맡길 사람이 있다면 하던 말. 그때는 반쯤 농이었는데 이제는 농이 못 되오.”

도겸“내가 성문을 닫아걸라 했소. 사람들을 성 안에 가두고 끝까지 가자고 했소.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 방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그 사람들 숨소리요.”

유비는 대꾸할 말을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진등이 헛기침을 했다.

진등“주공, 말씀을 줄이십시오. 기운이 새십니다.”

도겸“샐 대로 샜소. 아들놈들은 이 서주를 못 쥐오. 쥘 놈들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남을 불러다 앉혀 놓고 말하지 않았지. 미축 이 사람도 알고, 진등도 아오.”

미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진등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겸의 손이 유비의 소매를 붙들었다. 얇은 종이 같은 손이었다. 유비는 그 손을 떼어 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도겸“대답은 오늘 안 해도 되오. 오늘 하면 내가 들을 수 있을 때 하는 거고, 내일 하면 못 들을 때 하는 건데, 그 둘이 뭐가 다르겠소.”

유비“…어르신, 그런 말씀은 거두십시오.”

도겸“거두라는 말 하는 사람은 많소. ”

유비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있었다. 약 달이는 김이 침상 위로 옅게 올랐다.

도겸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사이 이마에 땀이 한 줄 맺혔다. 진등이 수건을 적셔 닦아 주려 하자 도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겸“현덕, 하나만 묻겠소. 조조가 우리 서주를 친 게 정말 내가 사람을 시켜서라고 생각하오?”

유비“…저는 그 일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도겸“대답 한번 얌전하구려. 장개란 놈은 내 휘하였소. 그건 맞소. 시켰느냐 하면, 나는 시킨 적이 없소. 안 시켰다고 말해 줄 사람도 이제 없고.”

유비는 입을 다물었다. 시켰든 안 시켰든 사수 가의 일은 이미 일어난 뒤였다. 도겸은 유비의 침묵을 오래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도겸“믿어 달라는 말이 아니오. 그냥 누구한테든 한 번은 말해 두고 싶었소.”

방을 나서려는데 문 곁에 서 있던 미축이 유비의 소매를 잡았다가 놓았다. 말을 하려다 만 얼굴이었다. 유비가 눈으로 물었으나 미축은 고개만 숙였다. 문밖 마당에서는 관우가 말고삐를 쥐고 서서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흐린 하늘에 눈 올 기색이 돌았다.

V · 곳간 열쇠

마당으로 내려서려는데 미축이 뒤따라 나왔다. 그는 손에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쇠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낮고 둔했다. 열쇠는 열두 개쯤 되어 보였다.

미축“현덕 공. 잠깐 따로 뵙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유비“말씀하시오.”

미축“서주 곳간 열쇠입니다. 오늘 아침 제가 전부 점검했습니다. 사수 쪽 곳간 셋은 장부와 실물이 안 맞습니다. 봄에 누가 쓸어 갔는지 장부에는 없습니다.”

유비는 열쇠 꾸러미를 받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쇠 고리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글자가 번져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반쯤이었다.

유비“쓸어 간 사람이 조조군이오, 서주 사람이오.”

미축“…모릅니다. 확인할 길도 없고요. 알아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복도 끝 마당에서 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맨발이었고 코가 흘러 있었다. 아이는 열쇠 꾸러미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아이“아저씨, 그거 곳간 열쇠죠? 우리 아버지가 곳간 지기였는데요.”

미축“얘야, 여긴 오면 안 된다.”

아이“아버지가 그랬는데요. 열쇠는 쥐고 있기가 어렵지 열기는 쉽다고요.”

미축은 얼굴이 굳었다. 유비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 신발이 없었다. 발가락 사이에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유비“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아이“몰라요. 사수 쪽에 일하러 갔는데 안 왔어요.”

유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열쇠를 한 번 만져 보고 금세 뛰어갔다. 미축이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유비는 이번에는 손을 뻗어 받았다. 쇠가 차가웠다.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복도 저쪽에서 진등이 다가오다가 걸음을 늦추었다. 그는 아이와 열쇠를 번갈아 보더니 코로 숨을 내쉬었다.

진등“현덕 공. 호족들이 오늘 저녁 모입니다.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유비“대답이 정해지지 않았소.”

진등“정해지지 않은 채로 가셔도 됩니다. 호족들도 오늘 다 받아 갈 생각은 아닙니다. 얼굴이나 보려는 거지요.”

유비“원룡(元龍) 공은 말을 참 모나지 않게 하는구려.”

진등“모난 말을 하면 도겸 어른께서 먼저 일어나실 것 같아서요.”

유비는 웃지 않고 열쇠를 소매에 넣었다. 소매가 한쪽만 묵직해졌다. 걸을 때마다 쇠가 허벅지를 쳤다. 마당 끝 우물가에서 아낙 둘이 물을 긷다 말고 이쪽을 보았다. 유비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짐작이 갔다.

유비의 선택

VI · 열린 문

유비가 열쇠를 받겠다고 말한 날, 서주성 문은 아침 일찍 열렸다. 문을 여는 데 관우의 손을 빌리지는 않았다. 유비가 직접 문턱을 넘어 안쪽 빗장을 올렸다. 빗장이 무거워서 한 번에 올라가지 않았다. 두 번째에 올라갔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은 없었다. 그 점이 유비를 오히려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선 채로 길을 터 주었고, 그 길 한가운데에 어제 그 맨발의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아저씨, 정말 열쇠 쥐셨네요.”

유비“쥐었다. 잘 쥘지는 모른다.”

아이“아버지 말이 맞았네요. 쥐고 있기가 어렵다던데.”

유비는 웃었다. 웃음이 얼굴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미축이 곁에서 곳간 장부를 펼쳤고 진등은 서주 호족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호명된 사람들은 대답하며 한 걸음씩 나왔다. 대답 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관우가 말없이 유비 곁으로 와 섰다. 장비는 문 밖에서 사람들 사이를 어색하게 오갔다. 그가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아침 햇빛이 문 안쪽 마당 돌바닥을 천천히 데웠다.

곳간에서 곡식 자루 몇 개를 꺼내 문 앞에 쌓았다. 처음 풀린 곡식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줄을 섰다. 줄이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유비는 줄의 맨 끝까지 눈으로 따라가다가 눈을 돌렸다. 끝을 보면 자루가 모자란다는 계산이 먼저 나올 것 같았다.

저녁 무렵 호족들이 마당에 모였다. 누군가 술 한 병을 내놓았으나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유비는 병을 쳐다보다가 자기 손으로 한 잔을 따랐다. 마시지는 않았다. 잔을 내려놓으며 호족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몇은 잔을 보았고 몇은 곳간 쪽을 보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열쇠를 미축에게 돌려준다. 이튿날부터 소패 성문 밖 풀밭에 기대를 안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성문은 닫힌 채다. 쪽문만 한 번 열린다.

VI · 문 밖의 사람들

유비는 열쇠를 돌려주었다. 그날 밤 미축은 꾸러미를 받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열쇠끼리 부딪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났다. 미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비도 변명하지 않았다.

미축“…알겠습니다. 소패에서 뵙겠습니다.”

유비“소패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곡식 몇 자루는 같이 가져가겠소. 서주 곳간 것이 아니라 내 몫으로 가진 것이오.”

미축“그걸로 사람들이 먹겠습니까.”

유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소패 성문 밖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주성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기대를 안고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 앞 풀밭에 앉아 보퉁이를 풀었고, 밤이면 불을 피웠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장비가 성벽 위에서 소리쳤다. 문 열어 주자고, 성안에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유비는 팔짱을 낀 관우를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성안에는 이미 군이 먹을 곡식밖에 없었다.

관우“형님, 저 사람들 가운데 서주성에서 보았던 아이가 있습니다.”

유비“어느 아이.”

관우“맨발이었던 아이요. 오늘은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누가 빌려준 모양입니다.”

유비는 성벽 위에서 풀밭 쪽을 내려다보았다. 불빛 사이에서 아이를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지는 않았다.

장비가 어느새 곁에 와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곡식 자루 두 개를 어깨에 얹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유비는 말리지 않았다. 문이 아니라 쪽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서주를 받고 직접 빗장을 올린다. 사람들은 무릎 대신 길을 터 주고, 맨발의 아이가 열쇠를 쥐었느냐고 묻는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점 3 / 3진구오장

VII · 맛없는 밥

어머니가 삼아 놓은 신은 끝내 받지 못했다. 문 기둥에 걸려 있던 짚신 한 짝이 아직도 눈앞에 걸려 있는 듯했다. 보내지 못한 서한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그 없음이 오히려 더 묵직했다.

외사촌에게 가는 서한은 장사꾼 손에 넘어갔다. 그 서한이 팽성에 닿았는지, 닿았어도 읽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진구는 답장이 없는 것을 답으로 쳐야 할지 아침마다 같은 셈을 되풀이했다.

서주를 나선 뒤로 밥은 한 번도 맛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진구는 오 사람 몫을 뜨려고 국자를 쥐었다가 솥 바닥을 봤다. 밥알이 몇 알 눌어붙어 있었다. 눈으로 쟀다. 오 사람이 한 숟가락씩 나누면 모자랐다.

덕만“오장님, 오늘은 제가 덜 먹겠소.”

진구“먹어. 덜 먹는 사람 나오면 내가 셈이 틀린 게 된다.”

덕만“셈은 원래 틀려 있소. 솥 빈 걸 오장님이 어쩌겠소.”

진구는 대꾸하지 않고 숟가락을 두 번 세워 상을 톡톡 쳤다.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 소리가 반가웠다. 반갑다고 생각한 순간 입안의 밥이 모래처럼 변했다. 그는 씹지 않고 삼켰다.

막쇠“오장님. 서주서 쓴 목간 있잖소, 누가 이름을 받아 적는다는데요. 문관이 와서.”

진구“무슨 이름.”

막쇠“우리 오가 어느 마을을 지났는지, 거기서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하라 합디다.”

덕만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상 위에 기름기 없는 국이 반쯤 남아 있었다. 덕만은 손가락으로 국그릇 테두리를 한 바퀴 돌렸다.

덕만“뭐라 쓰오. 우린 시킨 대로 했는데.”

막쇠“시킨 대로 했다 쓰면 되지.”

덕만“그럼 시킨 사람 이름도 써야 하오?”

막쇠는 대답이 없었다. 진구도 말이 없었다. 불 위의 솥이 식어 갔다. 진구는 오른손 마디를 꺾으려다 멈췄다. 꺾을 때 나던 소리가 언제부터 안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은 말없이 접혔다 펴졌다.

해 질 녘에 군이 멈췄다. 진구는 오 사람을 데리고 물을 길러 개울로 내려갔다. 개울물은 맑았고 얼음 틈으로 흘렀다. 두레박을 던지자 물에 비친 하늘이 흔들렸다. 그는 두레박 줄을 당기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낯설었다. 턱 아래에 수염이 며칠째 깎이지 않은 채 거칠게 돋아 있었다.

덕만이 옆에서 두레박을 헹구며 중얼거렸다. 물소리에 묻힐 만큼 낮은 목소리였는데, 진구의 귀에는 이상하게 또렷했다.

덕만“오장님, 고향 가면 뭐 하시겠소.”

진구“…논 갈아야지.”

덕만“난 가서 닭부터 잡을 거요. 서주에선 닭 한 마리 못 봤으니까.”

덕만이 웃었다. 웃음 끝이 이상하게 접혔다. 진구는 물동이를 어깨에 얹었다. 물이 출렁이며 어깨를 적셨다. 차가웠는데 시원하지는 않았다.

VIII · 이름을 받는 막사

다음 날 아침 오장들이 하나씩 불려 갔다. 막사라고 해 봐야 천막도 없이 수레 위에 널빤지를 얹은 임시 탁자 하나였다. 탁자 뒤에 앉은 사람은 서기 둘이었고, 한 걸음 뒤에 문관 차림의 사내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진구는 그가 진궁이라는 것을 이름보다 먼저 눈으로 알았다. 조조를 연주목에 올린 사람이라고 했다. 얼굴은 뜻밖에 평범했다.

서기“다음. 오장 진구. 소속 백부장 아래 오 사람. 원정 중 지난 마을 이름과 맡은 일을 말하라.”

진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할 마을 이름은 알고 있었다. 팽성 동쪽 마을 다섯, 모두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맡은 일도 알았다. 선봉, 곳간 점검, 마을 입구 봉쇄. 하지만 그 낱말들은 입에 올리기엔 너무 반듯하게 닦여 있었다.

서기“말하라. 시간 없다.”

진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서기를 손으로 말렸다. 그리고 진구를 보았다. 눈이 조용했다. 화난 얼굴도 불쌍히 여기는 얼굴도 아니었다. 붓을 쥔 사람이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진궁“급할 것 없습니다. 이름부터 들려주시지요. 오장이 아니라 부모가 지어 준 이름으로요.”

진구는 숨이 막혔다. 오장이라는 호칭은 손에 잘 맞는 도구 같았다. 이름은 달랐다. 이름에는 아홉째라는 뜻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가 아침마다 부엌에서 부르던 소리가 들어 있었다.

진궁“빈칸으로 두어도 됩니다. 오늘이 아니어도 됩니다. 다만 다음 사람이 기다리니 오래는 못 드립니다.”

뒤에 줄 선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탁자 위 목간에는 이미 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군데군데 빈칸이 있었다. 진구는 그 빈칸을 오래 보았다.

진구는 앞줄에서 불려 나갔던 병사 얼굴이 떠올랐다. 갓 스물이나 됐을까, 입술을 깨물며 걸어 나갔다가 한 줄만 말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무에게도 눈을 주지 않았다. 지금 그 병사는 줄 끝에서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서기가 붓끝을 입김으로 녹였다. 진구는 그 소리를 들었다. 후, 하는 작은 숨소리였다. 사수 가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 작은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진궁은 여전히 기다리는 얼굴로 서 있었다. 먹이 마르기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했다.

진구의 선택

IX · 처음 적히는 이름

진구는 이름을 말했다. 진구. 한 번에 소리가 나오지 않아 두 번 말했다. 서기가 붓을 움직였다. 먹이 번지지 않게 천천히 쓰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이름이 목간 위에서 한 획씩 자리를 잡았다.

진구“팽성 동쪽 마을 다섯입니다. 첫째는 이름 없는 마을이었고, 둘째는 방앗간이 있는 마을…”

그는 마을 이름을 하나씩 댔다. 입은 느렸고 말은 자주 끊겼다. 서기는 끊길 때마다 붓을 멈추고 기다렸다. 진궁은 서기가 쓰는 속도에 맞춰 목간 끝을 손으로 눌러 주었다.

진구“선봉이었습니다. 문 앞에 섰고, 문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막았습니다. 막고 난 뒤에는…”

서기“막고 난 뒤에는.”

진구“막고 난 뒤에는 뒤에서 오는 사람들이 들어갔습니다. 제 손으로 문을 닫은 건 아니지만 열어 둔 건 접니다.”

진궁의 손이 목간 위에서 잠깐 멈췄다. 곧 다시 움직였다. 서기는 한참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기“이 말을 그대로 적으면, 군령을 어긴 죄로 다스려집니다. 적을까요.”

진궁이 대신 대답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서기 쪽을 보지 않았다.

진궁“적으십시오. 본인이 말한 대로.”

진구는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서기가 마지막 획을 긋고 붓을 놓았다. 진구는 자기 이름이 적힌 자리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름 아래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이 반짝였다. 진구는 그 위로 손가락 하나를 가져갔다가 닿기 직전에 멈췄다.

진궁이 소매에서 마른 헝겊을 꺼내 건넸다. 먹이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구는 헝겊을 받아 들고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딱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자기 몸에서 난 것이라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군령대로 움직였다는 한 줄만 말하고 물러난다. 진궁은 빈칸을 손끝으로 쓰다듬고, 덕만은 그게 제일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날 밤 진구의 입술이 얼얼하다.

IX · 비워 둔 칸

진구는 이름을 말했다. 진구. 두 번째 칸에는 이렇게 답했다.

진구“군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장으로서 맡은 일을 했습니다.”

서기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붓이 한 줄을 긋고 지나갔다. 목간 위에서 그 한 줄은 다른 줄들보다 깨끗했다. 서기는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다가 진궁을 쳐다보았다.

진궁“…한 줄뿐입니까.”

진구“예, 그렇습니다.”

진궁“알겠습니다. 그럼 한 줄로 적으십시오. 빈칸은 비워 두고요.”

서기가 붓을 놓았다. 진구는 인사를 하고 탁자 앞을 물러났다. 뒤에 서 있던 다음 병사가 앞으로 나갔다. 진구는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궁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목간의 빈칸 하나를 손끝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덕만이 줄 끝에서 슬쩍 다가왔다. 입가에 웃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덕만“뭐라 했소.”

진구“군령대로 했다고.”

덕만“잘하셨소. 다들 그렇게 말합디다. 그게 제일 안전하오.”

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다는 말이 입속에서 밥알처럼 굴러다녔다. 그는 숟가락을 두 번 세우려고 손을 들었다가, 상이 없는 허공에서 손이 멈춘 것을 알았다. 천천히 손을 내렸다.

저녁 점호 때 백부장이 오장들을 훑어보며 다 말했느냐고 물었다. 진구는 예, 하고 대답했다. 백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진구는 대답한 입술이 얼얼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자기 이름과 팽성 동쪽 마을 다섯을 직접 말한다. 서기가 그대로 적자 진궁은 목간 끝을 눌러 주고, 진구의 손가락 마디에서 딱 소리가 난다.

제3장 · 루트 T2

배반의 밤

194년 가을 · 이름을 적던 손이 먼저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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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목록을 적던 문관 하나가 어느 새벽 말 두 필과 함께 진영에서 사라졌다. 같은 가을에 소패에는 비가 내렸고, 한 노인이 마지막으로 장부 한 권을 들려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나루에서는 밤길을 달리던 전령 하나가 불을 켜지 않은 말 몇 필과 마주친다. 세 사람이 같은 밤에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시점 1 / 3조조연주목

I · 비어 있는 방석

사수 가의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행군 사흘째부터 없어졌다. 대열의 입이 저절로 닫혔고 조조는 그 닫힘이 편한지 불편한지 따져 보지 않았다. 다만 말들이 막사 문턱을 넘기 전에 먼저 식어 버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군령을 비켜 간 오장 몇이 매를 맞았다는 보고가 붙어 있었다. 조조는 그 이름 옆마다 붓으로 점을 찍다가 어느 순간부터 세기를 그만두었다. 점이 모두 몇 개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진궁 하나일 것이었다.

지나온 마을마다 곳간이 비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병사들은 그것이 주공의 뜻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했다. 조조는 그 말이 어느 입에서 시작됐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서주는 등 뒤에서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 보고서가 얇아서 군막이 오히려 휑했고, 조조는 얇은 까닭을 따져 보다가 그만두었다. 그만둔 자리에 다른 생각이 올라와 앉았다.

아침 군막에 들어서던 조조는 걸음을 반 박자 늦추었다. 서쪽 모퉁이에 진궁의 방석이 놓여 있었는데 사람이 앉았던 자국이 없었다. 붓통에는 붓이 한 자루도 꽂혀 있지 않았고 벼루에 남은 먹물은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말라 일어나 있었다.

조조“공대는 어디 갔나.”

노복“새벽에 일찍 나가셨습니다. 말 두 필을 내 달라 하셨고, 마구간지기가 어디 가시느냐고 여쭈니 하수가 어디쯤인지만 물으셨답니다.”

조조“하수라. 동군 쪽으로 가는 길이로군.”

노복“목간 한 묶음은 주공 앞에 올려 두라 하셨습니다. 제가 감히 손을 못 대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하후돈이 숨을 들이쉬며 군막으로 들어섰다. 갑옷 끈도 채 매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방석을 한 번 보고 조조를 한 번 보았다.

하후돈“주공, 진영 밖 초소에서 새벽에 두 사람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영패를 들고 있어서 막지 않았답니다.”

조조“영패를 내준 건 나일세. 척후 다니라고 한 적이 있었지.”

하후돈“그때는 그렇다 쳐도 이번에는 척후가 아닌 모양입니다. 말 안장에 서책 상자까지 얹었답니다.”

조조는 대답하지 않고 목간 묶음의 끈을 풀었다. 첫 장에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서주에서 돌아오며 진궁이 모은 이름들이었고, 죽은 자의 이름이 아니라 군령 사이로 빠져나간 산 자들의 이름이었다. 마지막 칸은 비어 있었고 그 아래에 붓자국이 점 하나로 찍혀 있었다.

조조“원양, 이 빈 칸을 보게. 쓰다 만 건가, 일부러 비워 둔 건가.”

하후돈“글쎄요. 쓰다 만 이름이라면 아마 자기 이름이겠지요.”

조조는 웃지 않았다. 그는 목간을 다 말기도 전에 끈부터 하후돈에게 던졌다.

그때 파발 하나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말에서 막 내린 얼굴에 흙물이 튀어 있었다.

파발“아룁니다. 복양에 여포의 깃발이 올랐습니다. 장막이 성문을 열어 맞았다 하고, 근방 군현 몇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합니다.”

조조“진궁이라는 이름은 거기 없나.”

파발“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조조“없을 테지. 아직은.”

II · 순욱의 서신

오후가 되자 순욱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사자는 하수를 건너오느라 바지가 허벅지까지 젖어 있었다. 조조는 서신을 받기 전에 먼저 앉으라고 손짓했다.

사자“문약 어른께서 꼭 직접 드리라 하셨습니다. 견성과 범, 동아 세 성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른 성은 모두 돌아섰다는 소문입니다.”

조조“세 성이라. 많이도 남았군.”

사자“정 선생이 견성에서 소금 대신 말린 쑥을 풀어 쓴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쓰다고 하면서도 먹는다고요.”

조조는 서신을 펼쳤다. 순욱의 글씨는 평소처럼 간결했다. 군을 되돌릴 것인지 서주를 먼저 끝낼 것인지 묻는 말은 한 줄도 없었다. 다만 맨 끝에 세 성의 곳간 수와 성문 열쇠를 쥔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조조“이 사람은 내게 묻지 않고 숫자만 적어 보냈군.”

하후돈“숫자만 보내고 어쩌라는 겁니까.”

조조“그렇지. 숫자를 읽고 나서도 서주로 가겠느냐는.”

사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사자“주공,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는 길에 하수 나루에서 사람 둘이 말을 끌고 건너는 걸 보았습니다. 선비 차림이었고 짐이 서책이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지나가자 얼굴을 소매로 가리더군요.”

조조는 서신을 접던 손을 멈추었다. 군막 밖에서 말 우는 소리가 한 번 들렸다. 하후돈이 조조의 얼굴을 살피다가 시선을 돌렸다.

조조“그가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면 나를 만나기 싫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게 싫었거나.”

하후돈“뒤쫓으면 오늘 밤 안에 잡습니다. 말만 내주십시오.”

조조“잡아서 무엇을 묻나. 왜 떠났느냐고? 대답이야 이미 방석에 놓고 간 셈인데.”

조조는 방석을 한참 바라보았다. 방석 위에는 먼지가 앉기 시작했다. 그는 서신과 목간을 나란히 탁자에 놓고 지도를 끌어당겼다.

조조의 선택

III · 남쪽으로 돌린 말머리

조조가 군령을 내리자 장수들이 한 사람씩 고개를 들었다. 하후돈이 맨 먼저 입을 열려다 다문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대신 곁에 있던 장수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하후돈“주공, 연주의 세 성이 버티고 있다 해도 소금이 떨어졌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조조“알고 있네. 그러니 서주에서 오래 걸리지 않게 끝낼 걸세.”

하후돈“끝낸다는 건 어디까지입니까.”

조조는 대답을 고르는 대신 지도 위의 서주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짚은 곳이 하필 사수였다. 손가락이 그 위에서 잠시 떨리다가 옆으로 비껴 팽성을 눌렀다.

조조“팽성까지다. 그 이상은 군령으로 따로 내린다.”

하후돈“팽성이라면 도겸이 아직 문을 닫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또 사람이 쏟아지면 연주 백성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조조“연주 백성들은 이미 여포에게 문을 열어 주었네. 이제 와서 내 평판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야.”

순욱의 서신이 군막 한가운데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장수들은 그 서신을 읽지 않았으나 서신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 방 안의 공기를 눌렀다. 조조는 그것을 알면서도 서신을 치우지 않았다.

노복“주공, 군령기는 어느 쪽으로 올릴까요.”

조조“남쪽이다. 그리고 서쪽 모퉁이 방석은 가져가지 말고 그대로 두게.”

노복“빈 방석을 말씀입니까.”

조조“그래. 돌아와서 앉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노복은 대꾸하지 않고 물러났다. 군막이 비자 조조는 목간 묶음을 탁자 끝으로 밀어 놓았다. 끈을 다시 맬 때 매듭이 처음보다 헐거웠다. 밖에서는 군령기를 올리는 북소리가 느리게 이어졌다. 조조는 그 박자에 맞춰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가 손을 거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회군을 명하고 하수를 건넌 진궁을 쫓지 않는다. 안장 뒤에 방석을 맨 빈 말이 북쪽 안개 속으로 가고, 조조는 견성에 닿으면 정욱에게 소금부터 주라고 한다.

III · 북쪽 길의 빈 안장

회군령이 내려지자 군막은 의외로 빨리 걷혔다. 병사들은 서주를 등지고 가는 걸 반기는 눈치였지만 그 반가움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조조는 앞서 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서주 쪽 하늘에는 아직 연기가 가늘게 걸려 있었고, 그는 그것이 불인지 안개인지 가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하후돈“ 사수 이후로는 다들 밤에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조조“잠 못 자는 건 군사들뿐이 아닐세.”

하후돈“주공, 진궁을 쫓지 않기로 하신 겁니까.”

조조“쫓지 않는 게 아니라 순서를 정한 걸세. 붙들어 와 봐야 다시 내 곁에 앉을 사람이 아닐세.”

하후돈“두 번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조조“두 번째는 안에서 문을 닫고 나가지. 그건 나도 못 막아.”

하후돈은 입맛을 다시고는 말머리를 돌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조조는 노복에게 눈짓을 보냈다. 노복이 빈 말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

노복“주공, 안장 뒤의 방석은 어디다 둘까요.”

조조“그냥 두게. 말이 가볍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노복“가벼운 건 말이지 방석은 아닙니다.”

조조는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는 나지 않고 입꼬리만 짧게 움직였다. 순욱의 서신은 품에서 따뜻해져 있었다. 그는 길 끝 안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조조“견성에 닿으면 정욱에게 소금부터 줘. 쑥은 이제 그만 먹이라고 하게.”

노복“쑥은 버려도 됩니까.”

조조“버리지 말고 남겨 두게. 어디 쓸 데가 있을지 모르니까.”

노복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수레바퀴가 젖은 길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고, 조조는 빈 안장 위의 방석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한 번씩 그쪽에 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서주로 말머리를 돌려 팽성까지만 끝내라고 명한다. 순욱의 서신은 군막 한가운데 놓인 채 그대로이고, 서쪽 모퉁이의 빈 방석은 치우지 않는다.

시점 2 / 3유비소패 주둔

IV · 비 맞은 장부

서주에서 올라오는 소문은 사수 얘기로 시작해서 사수 얘기로 끝났다. 유비는 중간쯤에서 손을 들어 말렸다. 끝까지 들으면 군막 밖으로 걸어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군령을 어기고 사람을 빼낸 조조군 오장들 얘기가 소문 속에 섞여 있었다. 유비는 그 대목에서 한 번 눈을 감았다. 오장들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약탈과 불 얘기가 소문의 반을 채웠다. 조조가 칼을 거두었다는데도 곳간이 탔다고 했다. 유비는 누가 불을 질렀는지 묻지 않고 곳간이 몇 채 남았는지부터 물었다.

소문은 짧았다. 조조군이 물러갔다는 얘기가 전부였다. 유비는 물러간 군이 무엇을 두고 갔는지 오히려 그것이 궁금했다.

평원성을 새벽에 나선 일은 소패 주둔의 값으로 돌아왔다. 빌려 쓴 군사는 갚을 길이 없었고, 도겸 쪽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빚이 한 푼씩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평원성을 늦게 나선 대가는 팽성의 소문으로 돌아왔다. 도겸 쪽 사람들은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소패의 군막 안에서는 모두가 그 날짜를 알고 있었다.

비는 사흘째 그치지 않았다. 소패성의 기와 끝마다 물이 줄줄이 흘러내렸고 군막 밖 마당은 말발굽 자국마다 물이 고여 있었다. 유비는 문가에 앉아 짚신 끈을 다시 매고 있었다. 신발이 젖어서 그런지 끈이 자꾸 미끄러졌다.

장비“형님, 담성에서 사람이 왔는데 흠뻑 젖은 채로 기다리고 있소. 들여보내면 군막 바닥이 개울이 되겠소.”

유비“그냥 들이게. 바닥은 마르면 되네.”

진등이 안으로 들어서자 빗물이 옷자락에서 떨어져 발 주위에 둥글게 번졌다. 그는 품에서 기름 먹인 베로 싼 꾸러미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꾸러미는 겉만 젖었고 안쪽은 마른 채였다.

진등“주공께서 임종이 가까우십니다. 현덕 공께 이 장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호구와 곳간과 성문 수비 인원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유비“어르신이 직접 쓰셨는가.”

진등“서기들이 쓴 것을 주공께서 한 줄씩 읽고 서명하셨습니다. 눈이 침침하셔서 글자마다 손가락으로 짚으셨고요.”

관우가 군막 한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 냄새와 마른 쇠 냄새가 한꺼번에 방 안으로 퍼졌다. 그는 장부 꾸러미를 오래 바라보았으나 만지려 하지는 않았다.

관우“형님, 담성에 먼저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상 앞에서 전해 받아야 도리입니다.”

진등“병상 앞에서는 말씀을 다 못 하십니다. 그래서 이 장부를 먼저 보내신 겁니다. 소패에서 혼자 읽고 오시라고요.”

유비는 꾸러미를 받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바닥 위에서 장부의 두께가 느껴졌고 그 두께만큼 사람 이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V · 젖은 베 속의 말

꾸러미를 풀자 베 안쪽에 접은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도겸의 글씨라기엔 너무 가늘었다. 대필한 서기가 도겸이 말하는 대로 받아 적은 모양이었다.

진등“이 서신은 제가 읽겠습니다. 주공께서 읽어 드리라 하셨습니다.”

유비“직접 읽겠네.”

진등“주공께서 현덕 공은 읽다가 눈물을 보이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눈이 흐려지면 줄이 어긋난다고요.”

장비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막았다. 관우가 그를 쏘아보았다. 진등은 서신을 무릎 위에서 펼치고 천천히 읽었다.

진등“‘이 장부를 읽고 나서 대답하시오. 서주를 누구에게 넘길지는 오래 생각했고, 그 대답이 이 안에 있소. 장부가 현덕에게 맞지 않으면 나는 거둬 가겠소.’”

진등“‘성문을 닫아걸라 했던 날 서기 하나가 울었다 하오. 나는 그 서기 이름을 모르오. 그 이름을 장부에서 찾아 주시오. 찾으면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겠소.’”

군막 안이 조용해졌다. 빗소리가 천장을 타고 일정하게 울렸다. 유비는 장부 꾸러미 위에 손을 얹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장비“아니, 영감님은 직접 오시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던지시오.”

관우“익덕, 그만하게.”

장비“숙제가 맞지 않소. 장부를 읽고 대답하라는 거 아니오. 읽는 데 하룻밤이고 대답하는 데 한 평생이면 누가 하자고 하겠소.”

진등“읽는 데 하룻밤이라면 대답은 오늘 밤 안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주공께서 눈을 감기 전에 대답이 오면 그게 조금 낫다고 하셨습니다.”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꾸러미 매듭에 얹은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 바람에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유비“원룡, 하나만 묻겠네. 이 장부에서 자네 이름은 어디쯤 있나.”

진등“셋째 권 끝쯤입니다. 호구로는 맨 끝에 있는 편입니다.”

유비“그럼 내가 읽다가 자네 이름에서 멈추면 어찌하면 되나.”

진등은 처음으로 대답에 시간을 들였다. 군막 안의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 한 줄 비쳤다.

진등“멈추지 마시고 그 다음 줄을 읽어 주십시오. ”

유비의 선택

VI · 줄을 따라 읽는 밤

장부를 펼치자 첫 장에는 성문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과 그 옆에 문지기 인원수가 먹으로 적혀 있었다. 유비는 줄을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읽는 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장비“형님, 이 정도 숫자면 성은 지킬 만하지 않소.”

유비“문지기 숫자만 보면 그렇지. 문지기가 마흔인데 성 안에 사는 사람은 이만 칠천이야.”

장비“이만 칠천이면 많은 거요 적은 거요.”

유비“한 사람씩 이름을 읽어 보면 아마 많다고 할 걸세.”

관우가 촛불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장부의 둘째 권에서 곳간 목록을 훑어보았다. 쌀과 소금과 마른 생선과 베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고, 끝에 이르러서는 쌀 수치가 한 번 줄어들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관우“형님, 여기 보십시오. 사수 근방의 곳간은 칸이 비어 있습니다. 불에 탄 곳을 지운 자국입니다.”

유비“지우지 않고 칸을 비워 둔 거로군. 지웠다면 새 칸으로 대신했을 텐데.”

관우“사수 쪽 곳간만 열 칸 가까이 됩니다.”

유비는 그 칸 위에 손을 올렸다. 먹이 마른 종이의 감촉이 손바닥에 거칠게 닿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손을 거두고 다음 장을 넘겼다. 읽을 곳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유비“원룡, 한 가지 약속하세. 이 장부를 다 읽은 뒤에 내 대답이 자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 칸을 채우는 일은 같이 하세.”

진등“약속하겠습니다. 다만 대답을 듣고 나서가 아니라 대답과 상관없이.”

유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장부로 눈을 돌렸다. 밖에서는 비가 조금 가늘어지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장부를 베로 싸 한쪽에 놓고 진등을 돌려보낸다. 빗속에 진등이 말에 오르고, 관우는 아무도 펴 보지 못하게 그 꾸러미를 지키겠다고 한다.

VI · 덮어 둔 장부

유비는 꾸러미를 다시 베로 싸서 탁자 한쪽에 놓았다. 매듭을 짓는 손이 처음보다 느렸다. 진등은 그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진등“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유비“원룡, 오해는 하지 말게. 읽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읽을 자격이 아직 없다는 뜻이야.”

진등“주공께서는 오늘 밤 안에 무어라도 들으셨으면 하셨습니다.”

유비“어르신 눈 감으시는 날 내가 담성에 가 있겠네. 그때 장부를 들고 가서 같이 읽겠어.”

진등“그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다만 어쩌면 그날 주공께서는 제 말을 들으실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등이 문가로 걸어 나갔다. 젖은 신발이 바닥에 철벅철벅 소리를 냈다. 장비가 말없이 그를 따라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 비 냄새가 와락 몰려들었다.

장비“원룡 형, 말은 좀 쉬었소? 비가 이렇게 오는데 또 달리면 말이 죽소.”

진등“말은 이미 갈아탔습니다. 이번엔 사람이 지치는 쪽이지요.”

관우가 군막에 남아 장부 꾸러미를 한참 보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가 접었다. 유비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관우“형님, 저 꾸러미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마르게만 두면 됩니까.”

유비“마르게 두고, 아무도 펴 보지 못하게 해 주게. 내가 읽는 날까지.”

장비“형님, 영감님이 눈 감기 전에 대답이 오면 조금 낫다던 말이 귀에 걸리지 않소.”

유비“걸리지. 그래서 덮어 둔 걸세. 아무 대답이나 보낼 수는 없으니까.”

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꾸러미를 탁자 안쪽 마른 자리로 옮겼다. 유비는 밖으로 나가 처마 밑에 서서 빗줄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담성 쪽 하늘은 어두워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촛불 아래 장부를 펴고 성문 이름부터 한 줄씩 읽는다. 관우가 사수 근방의 비어 있는 칸을 짚자 유비는 손을 얹고, 진등과 그 칸을 같이 채우자고 약속한다.

시점 3 / 3진구전령

VII · 젖은 전령패

어머니가 삼아 두신 신은 끝내 받지 못했다. 문 기둥에 걸려 있던 짚신 한 짝이 아직도 눈앞에 걸린 것만 같았다. 팽성에 보낼 서한은 애초에 쓰지 않았다.

외사촌에게 부친 서한은 장사꾼 손에 넘어갔다. 그 서한이 팽성에 닿았는지, 닿았어도 읽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진구는 답장이 없는 것을 답으로 쳐야 할지 아침마다 같은 셈을 되풀이했다.

군영의 밤은 문서를 나르는 일로 시작되었다. 진구는 오장 직책을 내려놓고 전령패를 받은 지 닷새째였다. 패는 쇠로 만든 작은 판이었는데 허리에 차면 걸을 때마다 군복 자락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 소리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아서 걸음이 자꾸 어긋났다. 천막 사이를 지날 때마다 불씨를 지키는 보초들이 힐끗 이쪽을 쳐다보았다. 전령은 어디서든 오래 서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진구는 닷새 만에 배웠다.

백부장“진구, 이 서신 상자는 하수 남안의 하후돈 진영으로 가는 것이다. 오늘 밤 안에 넘겨야 한다.”

진구“밤길로 갑니까. 나루 쪽은 어두워서 배가 안 뜰 수도 있습니다.”

백부장“배가 안 뜨면 얕은 곳으로 건너라. 군령이다.”

진구“알겠습니다.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백부장“알면 네 입이 무거워진다. 모르는 편이 편하다.”

진구“입이 무거워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백부장“나쁜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끌려가 매를 맞으면 아는 건 다 나온다. 그러니 처음부터 비워 둬라.”

덕만과 막쇠가 천막 앞에서 짚신 한 켤레씩을 쥐고 서 있었다. 덕만은 짚신을 진구에게 내밀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막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진구가 신발을 갈아 신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덕만“오장님, 아니, 이제 전령님이시지요. 이 신은 어제 제가 삼은 겁니다. 거친 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구“거칠어도 괜찮다. 며칠 신으면 길이 든다.”

막쇠“길이 들기 전에 발이 먼저 까집니다. 발 까지면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요.”

진구“까지면 그 자리에 풀잎을 대지. 너희가 가르쳐 준 거 아니냐.”

덕만이 얼굴을 붉혔다. 막쇠는 코웃음을 쳤으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진구는 상자를 등에 지고 천막 앞을 돌아 나섰다. 어둠 속에서 돌아보니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막 불빛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덕만“전령님, 돌아오시면 죽 한 그릇은 남겨 둘게요.”

진구“식기 전에 오마.”

진구는 몇 걸음 더 걷다가 상자 끈을 어깨에 고쳐 걸었다. 새 짚신은 발볼에 뻣뻣하게 닿았고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마른 볏짚 냄새가 올라왔다. 고향 논둑에서 맡던 냄새와 같아서 그는 잠깐 걸음을 늦췄다. 오 사람이 아니라 상자 하나를 지고 가는 밤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벼웠고, 그 가벼움이 또 마음에 걸렸다.

VIII · 불을 가린 나루

하수 북안 나루는 횃불 하나만 선착장 끝에 꽂힌 채 고요했다. 진구는 판자를 밟고 걸어가며 사방을 살폈다. 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가 갈대 사이에서 말 울음이 낮게 한 번 들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횃불 불꽃이 판자 쪽으로 기울어 흔들렸다. 판자 틈으로 검은 강물이 보였고 그 위로 불빛이 길게 깨져 떠다녔다. 진구는 무심코 허리의 전령패를 손으로 눌러 소리를 죽였다.

진구“거기 누구냐. 군의 전령이다.”

갈대가 갈라지고 말 두 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선두에서 말고삐를 쥔 사내는 선비 차림이었고 어깨에 물에 젖은 서책 상자를 메고 있었다. 횃불 쪽으로 걸어 들어온 얼굴을 보고 진구는 숨을 들이켰다.

진궁“진구, 아닌가. 사수 가에서 이름을 받던 날 내 앞에 선 오장. 맞지.”

진구“…진 선생님.”

진궁“전령패를 찼군. 하후돈 쪽 상자를 지고 가는 걸 보니 아직 정리가 덜 된 모양이야. 오장 직은 어쩌고.”

진구“직은 내려놓았습니다. 아니, 내려졌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진궁“어느 쪽인지 모르는 사람이 상자는 정확히 지고 있군.”

진구“지는 법밖에 배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진궁“그 상자, 열어 보지는 않았겠지.”

진궁은 어깨의 서책 상자를 판자 위에 내려놓았다. 곁에서 말을 잡고 있던 사내 하나가 불안한 눈으로 진구를 훑었다. 진궁이 손을 들어 그를 물렸다. 말 한 필의 발굽이 판자 끝에서 물을 한 번 찼다. 진구는 그 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진궁“나는 오늘 밤 이 강을 건넌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네가 하후돈에게 무엇을 보고하든 막지 않겠네. 다만 건너기 전에 하나 묻겠다. 사수 가에서 자네는 무엇을 했나.”

진구는 입이 말랐다. 쥐고 있던 손이 풀리자 전령패가 짧게 울렸다. 그는 상자 끈을 양손으로 쥐었다.

진구“…제가 보고하면 선생님은 이 강을 못 건너십니다.”

진궁“건너네. 자네는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자를 나르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오늘 밤은.”

진궁“같이 가자는 말은 아니네. 자네를 데려갈 자리가 내게는 없어. 다만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자네 입으로 직접.”

진구는 오른손 마디를 꺾으려다 상자 끈에 손이 묶여 있다는 걸 알았다. 대답을 미루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었으나 이 판자 위에는 미룰 곳이 없었다. 횃불이 한 번 낮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일어섰다.

진궁“새벽 전에 건너야 하네. 오래는 못 서 있어.”

진구“저는, 그러니까 그날”

진구의 선택

IX · 불러 준 이름

진구는 상자 끈을 놓았다. 상자가 판자 위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는 허리를 곧게 폈고, 그러자 전령패가 허리에서 한 번 크게 울렸다.

진구“제 이름은 진구입니다. 서주 사람이 아니라 연주 사람입니다. 사수 가에서 오장으로 있었습니다. 명령이 떨어졌을 때 제 손으로 오 사람을 앞으로 밀었습니다.”

진궁은 대꾸하지 않았다. 판자 아래로 강물이 낮게 부딪는 소리만 들렸다. 곁의 사내가 몸을 움츠렸다.

진구“밀면서 저는 밥 걱정을 했습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저녁에 먹을 쌀이 모자라지 않을까 하고요.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아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솥 바닥을 세었습니다.”

진궁“솥 바닥을 세는 동안 몇 사람이 갔나.”

진구“세지 못했습니다. 세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진궁은 서책 상자를 다시 어깨에 올렸다. 그는 붓을 꺼내려다 멈추고 손을 거두었다. 대신 진구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진궁“이름을 적을까 했는데, 자네 이름은 내가 적지 않겠네. 내가 적으면 내 목록이 되고, 자네가 직접 불러 준 이름은 자네 것이니까.”

진구“목록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진궁“들어갈 곳은 따로 있을 걸세. 내가 아닌 사람 앞에서 자네가 이 말을 다시 한 번 할 때가 올 거야. 오늘은 연습이라고 생각하게.”

진궁이 말고삐를 쥐었다. 말발굽이 판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울렸다. 진구는 비켜서서 길을 열었다.

진구“선생님, 저는 같이 가지 않겠습니다. 이 상자를 하후돈 장군께 전해야 합니다.”

진궁“그래. 상자는 상자대로 가게 두게.”

진구는 상자를 다시 짊어지고 얕은 여울을 찾아 상류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았을 때 횃불 아래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강물 위로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어머니를 모시려 했다는 효를 내세워 입을 닫는다. 진궁은 그 말이 자기가 놓고 온 말과 닮았다고 하고, 횃불이 꺼진 나루에 진구 혼자 남는다.

IX · 꺼진 나루

진구는 입을 열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모두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를 모시려고 군에 있었다. 어머니의 밥을 위해 쌀이 필요했고, 그래서 명령을 따랐다.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고쳐 붙였다.

진궁“대답하기 싫은가.”

진구“…군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효도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궁“효라.”

진궁은 그 한 글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는데 눈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는 서책 상자의 끈을 고쳐 매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궁“나도 사수 가에서 그 말을 들었네. 위에서 아래까지 다들 그 말을 하더군. 나도 한동안 그 말을 썼네. 자네가 들고 있는 말이 내가 놓고 온 말과 같은 모양인 것 같군.”

진구“선생님이 놓고 오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궁“충이네. 충이라는 말을 놓고 나서 나는 이 강을 건너는 거야.”

진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말고삐를 잡아 끌었다. 곁의 사내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말발굽 소리가 판자를 한 번 울리고는 강 쪽으로 사라졌다.

진구는 횃불 아래 혼자 남았다. 불이 한 번 크게 흔들리더니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하수 건너편 쪽에서 낮은 북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먼 곳에서 함성이 번졌다. 연주의 어느 성이 문을 여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진구“…전령패. 상자. 하후돈 진영.”

그는 중얼거리며 상자를 다시 짊어졌다. 걸음이 무거웠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음 걸음마다 다시 따져야 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진궁 앞에서 자기 이름과 사수 가에서 한 일을 스스로 말한다. 진궁은 그 이름을 자기 목록에 적지 않겠다고 하고, 말발굽 소리는 강 쪽으로 멀어진다.

제3장 · 루트 T3

탈영병

194년 가을 ~ 겨울 · 칼을 내려놓은 자와 문을 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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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내려놓고 서주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병사가 있었다. 군은 그를 이름이 아니라 빈자리로 센다. 같은 가을에 연주는 뒤집혔고, 조조는 돌아가는 길 위에 있고, 병든 도겸 곁에서는 유비가 문 하나를 앞에 두고 서 있다. 그중 둘은 한 우물가에서 스친다.

시점 1 / 3조조연주목

I · 고개 위의 막사

서주에서 올라온 보고는 숫자였다. 조조는 그 숫자를 절반쯤 읽다가 접어서 벼루로 눌러 놓았다. 사수 얘기는 아무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서주에서 올라온 보고 끝에는 군령을 비켜 가며 사람을 빼내다 매를 맞은 오장들 이름이 두어 줄 섞여 있었다. 조조는 그 이름들을 읽었지만 외우지는 않았다. 매를 칠 사람과 칠 이유는 이미 그의 붓 아래 정해져 있었다.

군령에서 한 줄을 지웠는데도 병영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똑같은 말로 시작했다. 불탄 곡식 창고 이야기였다. 지운 줄이 병사들 입에서는 오히려 더 크게 읽혔다고 하후돈이 돌려서 전했다.

칼을 거두고 돌아선 길이라 서주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얇았다. 조조는 얇은 종이를 두 번 읽었고, 두 번 읽고도 손에 남는 것이 없었다. 도겸은 아직 담성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고개 위에 친 막사는 바람을 한 면도 막아 주지 못했다. 조조는 군량 장부를 펴 놓고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하후돈이 들어와 휘장을 내리는 데 한참 걸렸다. 끈이 자꾸 풀렸다.

하후돈“주공, 군량이 사흘 치입니다. 말 먹일 것까지 다 합해서요.”

조조“어제는 이틀이라 하지 않았나. 하루가 늘었군. 다들 장하다.”

하후돈“어제는 그 자루를 안 센 겁니다. 오늘은 셌고요.”

조조“쌀 자루에 어제 오늘이 있나. 있으면 내가 한 자루 더 달라고 빌어 보겠네.”

하후돈은 웃지 않았다. 조조는 장부를 덮고 그 위에 서신 한 통을 올려놓았다. 순욱의 서신이었다. 견성과 범과 동아, 세 성이 남았다고 했다. 글씨는 반듯했고 마지막 줄에서만 한 획이 번졌다.

조조“세 개가 남았다네. 연주가 큰 고장인 줄 알았는데 손가락 세 개로 접히는군.”

하후돈“접히기만 하면 펴면 됩니다.”

조조“펴는 데 쓸 쌀이 사흘 치라는 말이지.”

하후돈“…공대(公臺)가, 장막과 함께 여포를 맞아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조조“들었나. 나도 들었네. 공대가 그랬다고. 나를 연주목으로 올려 앉힌 사람이 공대인데, 내려오는 길은 어찌 이렇게 빨랐을꼬.”

말끝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늦었다. 하후돈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하후돈“제가 사람을 보내서…”

조조“가만있게, 원양(元讓). 자네 지금 누구 목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나.”

하후돈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조는 이번엔 탁자를 세 번 쳤다. 두 번이 아니었다. 쳐 놓고 나서 자기 손가락을 보았다.

하후돈“…동아가 먼저입니다. 순욱이 서신에 쓴 대로라면요.”

조조“문약(文若)은 쓴 것보다 쓰지 않은 것이 많은 사람이지. 마지막 줄에서 붓이 번졌네. 보았나.”

하후돈“못 보았습니다.”

조조“그럼 됐네. 본 사람만 마음이 아프면 되는 걸.”

하후돈은 한참 서 있다가 휘장 끈을 다시 맸다. 이번에는 끈이 풀리지 않았다.

II · 바퀴 한 짝

이튿날 해 질 무렵 군이 고개를 내려가다 멈췄다. 길가 풀밭에 수레 한 대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짐칸은 이미 누가 뜯어 갔는지 판자 두어 장만 남았고, 바퀴 한 짝이 땅에 반쯤 묻혀 있었다. 하후돈이 말에서 내려 조조 곁으로 왔다.

하후돈“이 근방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 어르신 수레가 섰던 데가요. 이게 그 수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조“모르는 게 낫겠군. 아는 것보다는.”

조조는 말에서 내려 바퀴 쪽으로 걸어갔다. 살 사이마다 마른 풀이 끼어 있었다. 손을 뻗자 바퀴 테의 쇠가 차가웠다. 그는 한참 서 있다가 소매로 살 하나의 먼지를 쓸었다. 쓸어 놓고 나서 왜 그랬는지 몰라 손을 거두었다.

허저가 뒤에서 한 걸음 가까이 섰다. 말이 없는 사람이라 서 있는 것이 곧 말이었다. 조조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조조“허저. 자네 아버지는 계신가.”

허저“돌아가셨습니다. 소 팔러 나가셨다가요. 소는 돌아왔습니다.”

조조“소는 돌아왔다고.”

허저“예. 고삐를 끌고 혼자 마당에 섰더랍니다. 어머니가 그 소를 못 팔게 하셨습니다.”

조조는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웃음이 아니었다. 바람이 한 번 불어 바퀴 살 사이 풀이 흔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둘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조조“서주 사람들은 이 길로 나와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꼬. 곡식도 소도 안 남았을 텐데.”

허저“모르겠습니다, 주공. 저는 곡식 쪽은 못 봐서요.”

하후돈“주공, 저 앞 마을은 이미 빈 것 같습니다. 연기가 안 오릅니다.”

조조“연기가 안 오르는 마을에 사람이 없다는 말이군. 틀린 말은 아닐세. 아직 사람이 있는 마을이면 연기가 오를 테니까.”

허저“오르는 데도 있습니다. 동쪽 산 밑에요. 가늘게요.”

조조“가늘게라.”

조조는 바퀴에서 손을 떼고 군 쪽으로 돌아섰다. 줄지어 선 병사들이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중 몇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하후돈이 다가와 말고삐를 건넸다.

하후돈“주공, 어디로 모실까요. 남쪽입니까, 서쪽입니까.”

조조는 고삐를 받아 쥔 채 길 끝을 쳐다보았다. 남쪽은 서주였다. 서쪽은 연주였다. 어느 쪽 길에도 풀은 똑같이 자라고 있었다.

조조의 선택

III · 남쪽으로 기운 깃발

조조는 그 밤 안에 명을 써 내렸다. 글씨는 평소보다 작았고 줄은 곧았다. 하후돈이 명을 받아 들고 천막을 나서며 한 번 돌아보았다.

하후돈“서주는 이미 한 번 쓸었습니다. 또 가면 거기서 얻을 것이…”

조조“얻으러 가는 게 아닐세. 아버님 일이 아직 안 끝났네.”

하후돈“…예.”

조조“순욱에게는 견성을 지키라고 쓰겠네. 쌀은 다시 모아 보낸다고 하고. 쌀이 어디서 나올지는 쓰지 않을 걸세.”

하후돈“어디서 나옵니까.”

조조“서주에서 나오겠지. 그러니 가는 게 아닌가.”

하후돈은 더 묻지 않고 휘장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끈을 매만졌다.

새벽에 깃발이 남쪽으로 돌아섰다. 병사들이 줄 서는 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한 오(伍)에서 누가 신 끈을 고쳐 매느라 줄이 멈췄는데, 뒤에서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하는 말은 오 안에서 한 번씩 돌려 가며 하던 것인데 그날은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순욱에게 가는 서신은 한 줄이었다. 견성을 지켜라. 쌀은 다시 모아 보내겠다. 조조는 서신을 봉하다가 인장이 비뚤게 찍힌 것을 보았다. 지우고 다시 찍으려다가 그냥 두었다.

허저“주공, 말이 오늘은 순합니다.”

조조“순하긴. 내가 고삐를 안 당겨서 그런 걸세.”

허저“그것도 압니다.”

조조는 처음으로 허저를 돌아보았다. 허저는 앞만 보고 있었다.

조조“자네는 내가 왜 서주로 가는지 묻지 않는군.”

허저“물으면 대답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더 힘드실 듯해서요.”

조조는 대답하지 않고 앞을 보았다. 길은 고개 아래로 흐리게 이어져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회군하고 서주는 놓아 둔다. 풀밭에는 바퀴 한 짝이 남는다. 그날 저녁 병사들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다.

III · 서쪽으로 도는 바퀴

조조는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명령을 받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허저가 맨 앞 수레 곁에 붙어 고삐를 쥐었고, 그 뒤로 군량 수레가 느릿하게 방향을 바꿨다. 바퀴가 진흙에서 빠지는 소리가 한 대씩 났다.

하후돈“주공, 그럼 서주는…”

조조“놔두게.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이제 내 일이 아니야.”

하후돈“도겸이 죽으면 누가 이어받는지 아직 모릅니다.”

조조“그걸 내가 알아서 뭘 하겠나. 알면 또 가고 싶어질 텐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조조는 한참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 아래 풀밭에서 바퀴 한 짝이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쇠테에 서리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곧 해가 오르면 녹을 서리였다.

허저“주공, 수레는 어떻게 합니까. 바퀴 말입니다.”

조조“그냥 두게. 가져가면 누군가 또 찾으러 올 테니.”

허저“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조조“…없겠지. 그래서 두는 걸세.”

그날 저녁 군은 열 리를 갔다. 평소의 반도 안 되는 거리였다. 막사를 치면서 병사들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누가 먼저 무슨 농담을 했는지는 조조도 몰랐다. 웃음소리는 막사 사이로 번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조조는 장부를 펴지 않고 탁자를 두 번 쳤다. 칠 때 소리가 어제보다 컸다.

하후돈“주공, 오늘은 웃음소리가 났습니다.”

조조“들었네. 군량이 사흘 치인데도 웃는군. 내일은 나흘 치라고 해 두게.”

하후돈“거짓말을 하란 말씀입니까.”

조조“아니. 자루를 한 번 더 세어 보란 말일세. 어제와 다르게 나올 수도 있지 않나.”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그 밤 안에 서주를 다시 치라는 명을 쓴다. 쌀은 서주에서 나올 것이라 하고, 병사들은 말없이 짐을 도로 묶는다. 허저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시점 2 / 3유비소패 주둔

IV · 병상 곁의 말

서주에서 올라온 소문은 사수 얘기부터 시작했다. 유비는 그 얘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듣는 척만 했다. 끝까지 들으면 앞으로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주에서 올라온 소문 속에는 군령을 어기고 사람을 빼낸 조조군 오장들 얘기가 섞여 있었다. 유비는 그 대목에서 한 번 눈을 감았다. 누구냐고 묻지는 않았다.

서주에서 올라온 소문은 약탈 얘기였다. 조조가 칼을 거뒀는데도 불은 났다고 했다. 유비는 누가 불을 놓았는지 묻지 않고 불탄 곡간이 몇 개인지만 물었다.

서주에서 올라온 소문은 짧았다. 조조군이 물러갔다는 얘기뿐이었다. 유비는 물러난 군이 무엇을 두고 갔는지가 오히려 궁금했다.

평원성 문을 새벽에 나선 지 반년이 지났다. 4천 군을 빌려 쓴 값은 아직 갚을 길이 없었고, 도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값이 한 푼씩 올랐다.

평원성 문을 해가 중천에 오른 뒤에 나선 날을 유비는 하루도 잊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팽성이 무너졌다는 말을 도겸 쪽 사람들은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무거웠다.

담성 안채는 약 냄새가 짙었다. 도겸은 베개를 높이 괴고 누워 있었고, 눈은 뜨고 있었으나 초점이 자꾸 천장 쪽으로 미끄러졌다. 미축이 문 쪽에 서 있었고 진등이 침상 발치에 앉았다. 유비는 침상 가까이 무릎을 꿇었다.

도겸“현덕, 왔구려. 와 줘서…”

유비“누워 계십시오, 어르신. 말씀은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도겸“천천히 하면 내가 중간에 잊소. 어제는 아들 이름을 잊었소. 상(商)이던가, 응(應)이던가.”

도겸“지난봄에 내가 한 말, 기억하오? 서주를 맡길 사람이 있다면 하는 말. 그때는 반쯤 농이었는데 이제는 농이 못 되오.”

도겸“내가 문을 닫아걸었소. 성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끝까지 가자고 했소.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는데, 지금 숨소리가 그 사람들 숨소리요.”

유비는 대꾸할 말을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진등이 헛기침을 했다.

진등“주공, 말씀을 줄이십시오. 기운이 새십니다.”

도겸“기운이야 샐 대로 샜지. 현덕, 장개란 놈은 놓쳤소. 놓쳤다고 해야 하나, 내가 놓아 주었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소. 이제 와서는 다 같은 일이오.”

유비는 이불 가장자리를 바로 펴 주었다. 손등에 닿은 도겸의 손은 얇은 종이처럼 건조했다. 도겸은 그 손으로 유비의 소매를 붙들었다.

도겸“이 서주 말이오. 내 아들놈들은 못 쥐오. 쥘 놈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사람을 불러 앉혀 놓고 말하지 않았지. 미축 이 사람도 알고, 진등도 알고.”

미축은 문 쪽에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진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겸“현덕, 대답은 오늘 안 해도 되오. 내일도 괜찮소. …내가 들을 수 있으면 말이오.”

유비“…어르신,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도겸“다들 말리기만 하오. 하겠다는 사람은 영 없고.”

유비는 고개를 숙였다. 침상 위로 약 달이는 김이 옅게 올랐다.

V · 우물가의 매듭

도겸의 방을 나와 유비는 곧바로 동문 밖 마을 길로 나갔다. 관우와 장비가 뒤를 따랐으나 일부러 열 걸음 정도 떨어져 걸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길가 집 문턱에 앉은 노인, 솥을 닦는 아낙, 등에 아이를 업은 사내. 유비가 지나갈 때마다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려 보았다.

장비“형님, 저 사람들 다 형님 보는 겁니다.”

유비“알고 있다, 익덕아. 말은 시키지 마라.”

장비“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죠.”

골목 끝 우물가에서 아낙들이 물을 길고 있었다. 줄 맨 뒤에 베옷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굳었으며, 두레박을 기다리면서도 우물이 아니라 먼 데를 보고 있었다. 유비는 걸음을 늦췄다. 얼굴은 낯설었다. 낯익은 것은 사내의 발이었다. 짚신 끈이 앞에서 한 번 감고 뒤에서 두 번 꼬아 매어 있었다. 서주 사람들은 그렇게 매지 않았다. 평원에서 붙잡아 둔 연주 쪽 포로들이 그렇게 맸다. 조조군이 연주에서 신던 방식이라고 어디서 들었던 것도 같았다.

유비는 사내 곁으로 가서 걸음을 멈췄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비“물 길으러 오셨소. 줄이 길구려.”

사내“…예.”

유비“발 좀 보게 해 주겠소. 끈이 헐거워진 것 같아서.”

사내는 멈칫했다가 시키는 대로 발을 내밀었다. 유비는 허리를 굽혀 끈을 풀었다가 다시 매 주었다. 이번에는 서주식으로, 앞에서 두 번 돌려 옆에 매듭을 지었다.

유비“이쪽이 덜 눈에 띄오. 겨울엔 길이 얼어서 풀어지기 쉽고.”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유비는 일어나 소매의 먼지를 털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열 걸음쯤 뒤에서 관우가 낮게 말했다.

관우“형님. 저 사람은.”

유비“운장, 오늘 물 길으러 온 사람일세.”

관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우물가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넘어가면서 성벽 그림자가 길 위로 길게 누웠다. 미축이 발소리를 죽이고 따라와 소매를 잡았다.

미축“현덕공. 성문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서주성 사람들입니다. 기다리겠답니다.”

유비“무엇을 기다린단 말이오.”

미축“대답을요. 공이 하실 대답을요.”

유비“나는 아직 질문도 못 들었소.”

미축“질문은 저들 얼굴에 써 있습니다.”

유비의 선택

VI · 열린 문

유비는 사흘을 사양했다. 사양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더 모여서 나흘째는 사양할 길이 없어졌다. 미축이 인장 상자를 들고 와서 유비 앞에 놓았다. 상자 뚜껑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미축“현덕공, 받으십시오. 이건 주공께서 직접 내리신 겁니다.”

유비“내가 이걸 받으면 다시는 돌려드릴 수 없게 되는 거 아시오.”

미축“압니다. 그러니 받으시라는 겁니다.”

유비는 두 손으로 상자를 받았다.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것이 이상해서 한 번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인장이 상자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났다.

서주성 문이 열리는 날 아침,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꿇어 엎드리지 않았다. 대신 일어서서 길을 터 주었다.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길가로 물러섰고, 아낙은 아이를 안고 한 걸음 비켰다. 유비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성문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장비“형님, 아무도 환호를 안 하는데요.”

유비“익덕아, 환호할 힘이 있겠나. 좀 있다 밥부터 짓게 하자.”

그는 성문 안쪽 첫 집에서 걸음을 멈췄다. 솥을 걸 자리를 보고 있던 아낙이 놀라 돌아보았다. 유비는 이름을 물었다. 아낙은 이름을 말하고 나서 입을 가렸다. 이름을 물어봐 주는 관리가 이제까지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비“솥은 어디에 걸 생각이오.”

아낙“저기, 담 밑에요. 바람이 덜 들어서.”

유비“내일은 이 집 담을 먼저 손보게 하겠소. 바람이 덜 들어야 솥도 오래 가니.”

아낙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가가 붉었다.

아낙“나리, 이름 말씀드렸는데 적어 가시지 않습니까.”

유비“적는 건 서리 일이오. 담 고치러 올 때 이름으로 부르겠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서주를 사양하고 소패에 머문다. 그날 저녁부터 서주 사람들이 보퉁이를 안고 성문 밖 풀밭에 앉기 시작한다. 유비는 쫓아내지 못한다.

VI · 문 밖의 사람들

유비는 서주를 사양했다. 사양한 이유를 입으로는 몇 번이고 설명했고, 그 설명이 모두 사실이었다. 다만 설명하는 동안 자기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들었다. 미축은 인장 상자를 안은 채 한 번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미축“…알겠습니다. 소패에 계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유비“조조가 다시 올지도 모르오. 내가 서주성에 들어앉으면 그 칼이 그쪽으로 향할 것이오.”

미축“지금도 향해 있습니다. 서주성은 어차피 서 있으니까요.”

유비는 할 말이 없었다. 미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소패 성문 밖 풀밭에 보퉁이를 안은 서주 사람들이 앉기 시작한 것은 소패로 돌아오고 사흘 뒤부터였다. 아무도 소리 내어 부탁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문 바로 앞 풀밭에 앉아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장비“형님, 저 사람들 쫓아낼까요?”

유비“쫓아내지 마라.”

장비“그럼 밥은요.”

유비“…밥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날 밤 유비는 성벽 위에 올라가 풀밭을 내려다보았다. 달이 낮게 걸려 앉은 사람들 머리 위로 희미한 빛이 퍼졌다. 어디선가 아이가 보채는 소리가 나다 멎었다. 유비는 자기 소매를 쥐었다 폈다. 소매에서 약 냄새가 났다. 도겸의 방에서 묻어 온 냄새였다.

관우“형님. 안 주무십니까.”

유비“운장. 저 사람들 중에 어제 우물가에 있던 이도 있을까.”

관우“…아침에 알아보겠습니다.”

유비“아니. 알아보지 말게. 그냥 있었으면 하는 것이니.”

관우는 대답하지 않고 성벽 아래 어둠을 같이 내려다보았다. 풀밭 어딘가에서 누군가 보퉁이를 베고 눕는 소리가 났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사흘을 사양한 끝에 미축이 건넨 인장 상자를 받는다. 서주성 문이 열리고, 백성들은 꿇는 대신 일어서서 길을 터 준다.

시점 3 / 3진구탈영병

VII · 물이 맛이 없다

어머니의 신은 끝내 받지 못했다. 문 기둥에 걸렸던 짚신 한 짝이 아직도 눈앞에 걸려 있었다. 보내지 못한 서한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그것이 오히려 더 묵직했다.

외사촌에게 보낸 서한 일이 마음에 남았다. 서한이 닿았든 아니든, 그 뒤 외사촌네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진구는 답장이 없는 것을 답으로 쳐야 할지 매일 아침 같은 셈을 되풀이했다.

서주 동쪽 작은 마을에서 진구는 한 달째 우물 물을 길었다. 베옷은 마을 할멈이 빌려준 것이었고 짚신만 자기 것이었다. 두레박이 올라올 때마다 물에서 쇠 맛이 났다. 실은 물맛이 아니라 입안의 맛이었다. 밥도 마찬가지였다. 죽이든 떡이든 입에 넣으면 삼키는 일만 남았다.

할멈“젊은이, 오늘도 한 동이만 길어 줘. 나머지는 내가 이고 갈 테니.”

진구“두 동이 길어 드릴게요.”

할멈“아이고, 말 많이 늘었네. 처음엔 하루 종일 한마디 안 하더니.”

진구는 대꾸하지 않고 두레박 줄을 당겼다. 손가락이 줄을 감는데 마디가 조용했다. 예전에는 줄을 잡기 전에 한 번씩 꺾었는데 언제부터 안 꺾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숟가락을 두 번 세우던 버릇도 사라졌다. 어제 할멈이 국을 퍼 주었을 때 그는 숟가락을 든 채 한참 앉아 있다가 그냥 떴다.

아이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서주 땅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이름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름을 알면 이름으로 부르게 되고, 이름으로 부르면 그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입에 올리게 될 것 같았다.

아이“아저씨, 오늘 물 많이 길었어요?”

진구“두 동이.”

아이“할머니가 아저씨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대요. 눈이 계속 열려 있다고.”

진구“눈이 열려 있어서 뭐.”

아이“자는 거 아니잖아요. 밤에도 안 자잖아요.”

할멈“얘, 아저씨 힘드니 그만 물어라.”

아이“힘든 사람이 눈은 왜 열어 놔요.”

할멈“힘들어서 열어 놓는 거란다. 닫으면 뭐가 보이니까.”

그 말에 진구의 손이 두레박 줄을 꽉 쥐었다. 할멈은 모르는 척 물동이를 이었다.

진구는 두레박을 내려놓았다. 밤이면 물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사수는 그 소리가 없었다. 시신이 강을 막아서 물이 흐르지 않는 소리. 그는 그것이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없는 것이라는 데 매일 밤 놀랐다. 놀랄 때마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우물 안을 내려다보았다. 하늘만 비쳤다. 그런데 진구 눈에는 하늘 한가운데에 얼굴 하나가 떠 있었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얼굴이었고, 눈을 뜨고 있었고, 진구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진구가 보는 쪽이 아니라 진구 뒤쪽을 보고 있었다.

아이“아저씨, 뭐 봐요?”

진구“…아무것도.”

아이“나도 볼래요.”

진구“보지 마라. 물 맛 떨어진다.”

아이는 그래도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구는 그것이 이상해서 우물 턱을 손바닥으로 한참 문질렀다.

VIII · 이름을 적는 날

겨울 초입 어느 날 아침 마을 어귀에 서리 둘이 나타났다. 한 명은 장부를, 한 명은 붓통과 작은 탁자를 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호구를 조사한다고 했다. 서주 주인이 누가 되든 곡식을 나누려면 식구 수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멈이 진구의 소매를 끌었다. 힘은 약했지만 놓지 않았다.

할멈“젊은이도 서야지. 이름 대고, 어디 사람인지 대고.”

진구“저는 나중에…”

할멈“나중이 없어. 줄 안 서면 밥도 없어.”

진구는 줄 맨 뒤에 섰다. 앞사람들이 하나씩 이름을 댔다. 노인 이름, 아낙 이름, 열 살 먹은 사내아이 이름. 서리가 붓으로 받아 적는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이름과 나이와 본적을 말하면 붓이 한 줄을 그었다. 줄이 줄어들수록 진구의 어깨가 굳었다. 앞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우리 어머니는 올해 여든이오. 여든에 호구에 오르는 건 처음이라 하시오.”

서리“이름만 대십시오. 나이는 제가 적습니다.”

이웃“이름은 어머니가 알아서 대시겠지요.”

웃음소리가 났다. 진구는 웃지 않았다. 아이가 어느새 곁에 와서 소매를 잡았다.

아이“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진구“…조용히 해.”

아이“나 아저씨 이름 몰라요.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데.”

진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앞에는 이제 할멈 한 사람만 남았다. 할멈이 이름을 대고 나이를 대고 본적을 대는 소리를 진구는 귀로 듣지 않았다. 대신 마을 앞 흙길에서 칼을 땅에 내려놓던 순간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었다. 칼이 땅에 닿을 때 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서리“다음.”

진구가 걸어 나갔다. 서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붓에 먹을 찍었다. 탁자 위의 장부에는 수십 개의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모두 마을 사람 이름이었다. 서리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리“이름, 나이, 어디 사람이오.”

진구는 입을 열려고 했다. 마른 목에서 숨이 한 번 걸렸다. 우물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눈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아이의 손이 소매를 꽉 쥐고 있었다. 뒤쪽 어디선가 두레박이 우물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서리“이름이 없소?”

진구“…있소.”

서리“그럼 대시오. 뒤에 사람 기다리오.”

할멈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줄 앞쪽 사람들이 들을까 봐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할멈“젊은이, 댈 거면 대고 말 거면 말아. 반쯤 대는 건 안 돼.”

진구의 선택

IX · 장부 위의 붓

진구는 이름을 댔다. 진구라고 했다. 연주 동군, 나이 스물여덟, 병사 오장. 말하는 사이 서리의 붓이 첫 획에서 멎었다. 먹이 붓끝에서 한 방울 장부에 떨어졌다.

서리“…오장이라고 했소?”

진구“예. 조조군 오장이었소. 서주에서 칼을 땅에 놓고 나왔소. 그 전에는 놓지 않았소.”

서리“그 전에… 뭘 했소.”

진구“세다가 그만뒀소. 사람을요. 몇인지는 말 못 하오. 안 세어 놨소.”

우물가가 조용해졌다. 두레박 줄이 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서리는 붓을 든 채 옆에 선 다른 서리를 돌아보았다. 둘 다 입을 열지 못했다. 할멈이 물동이를 내려놓았고, 동이 밑이 땅에 닿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진구가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꺾은 소리였다. 본인도 그 소리를 듣고 놀랐다. 한 달 넘게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손가락이 따뜻했다. 아이는 소매를 놓지 않았다.

아이“아저씨, 소리 났어요. 방금.”

진구“…그래. 났구나.”

아이“아파요?”

진구“아니. 오랜만이라 낯설어서.”

서리가 한참 있다가 붓을 다시 먹에 적셨다. 붓끝에서 먹이 고르게 흘러내렸다.

서리“오장 진구. 그대로 적겠소. 위에 올릴지 말지는 내가 정하지 않소.”

진구“적어 주시오.”

서리가 붓을 놀리는 동안 우물가 사람들은 아무도 흩어지지 않았다. 할멈이 물동이를 이고 걸어와 진구 곁에 섰다.

할멈“젊은이, 나는 처음부터 알았어. 신 끈 매는 게 달랐거든.”

진구“…알면서 왜 옷을 주셨습니까.”

할멈“옷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해.”

진구는 고개를 숙였다. 짚신 끈이 앞에서 한 번 감기고 뒤에서 두 번 꼬여 있었다. 며칠 전 누군가 서주식으로 고쳐 맨 줄 알았는데, 다시 매고 보니 손은 어느새 군인의 매듭을 짓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입을 열지 않고, 할멈이 그를 손자 금동이로 장부에 올려 준다. 자기 것이 아닌 이름이 적히는 것을 진구는 끝까지 지켜본다.

IX · 한 줄의 먹

진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을 펴 보였다.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는지 서리가 짧게 한숨을 쉬고 붓을 내려놓았다.

서리“말을 못 하오?”

할멈“아이고, 이 사람 낯 가려서 그래요. 우리 집 사람이오. 우리 집 사람으로 올려 주세요.”

서리“이름은 있을 것 아니오.”

할멈“손자요. 이름은… 금동이. 그렇게 올려요.”

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장부에 금동이 석 자를 적었다. 진구는 그 글자가 적히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자기 것이 아닌 이름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것이 곧 불안이 되려는 순간 입속으로 말이 굴러 나왔다. 아버님을 위한 일이었다. 입이 닳도록 외운 말이었는데 이번엔 외우는 소리가 낯설었다. 소리 내지 않았다.

아이“아저씨 이름이 금동이예요?”

진구“…그래.”

아이“거짓말.”

진구는 대답하지 않고 물동이를 들었다. 한 동이 들자 어깨가 아팠다. 물이 한 방울 튀어 짚신 위에 떨어졌다.

할멈“금동아, 오늘은 일찍 들어와서 국 먹어라.”

진구“…예, 할머니.”

할멈“예, 할머니라. 처음 듣네. 손자가 생기니 좋긴 좋다.”

진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할멈의 등은 이미 담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서리가 장부를 덮으며 다른 서리에게 말했다. 붓통 뚜껑이 탁자에서 한 번 굴렀다.

서리“금동이라. 동쪽 마을 몫으로 한 사람 늘었소. 곡식은 그만큼 더 받을 수 있겠군.”

다른 서리“손자라는데 나이가 안 맞지 않소.”

서리“할멈이 손자라는데 누가 아니라고 하겠소. 그대는 하겠소?”

다른 서리“…나는 안 하오.”

진구는 그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물동이를 어깨에 얹었다. 등 뒤에서 장부 덮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서리 앞에서 자기 이름과 오장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붓끝에서 먹이 떨어지고, 한 달 넘게 나지 않던 손가락 꺾이는 소리가 난다.

제3장 · 루트 T4

남은 이의 이름

194년 겨울 · 떠나지 않은 자가 쫓는 자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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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뒤집힌 겨울에도 조조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주공의 군령 아래서 탈영한 오장 한 사람의 이름을 받아 적는다. 한편 서주의 병상에는 마지막 말을 고르는 노인이 있고, 갈대밭에는 쫓기는 몸이 하나 누워 있다. 셋의 겨울이 사수 가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시점 1 / 3조조연주목

I · 곁에 남은 사람

사수 얘기는 이번에도 아무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올라온 보고는 숫자뿐이었고, 조조는 그 숫자 밑에 깔린 것을 읽지 않으려고 애썼다.

군령을 비켜 가며 사람을 빼낸 오장들 이름이 보고 끝에 붙어 있었다. 매는 이미 쳤고 이름은 이미 적혔다. 조조는 그중 하나가 도망쳤다는 줄을 두 번 읽었다.

군령에서 한 줄을 지웠어도 병영의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불탄 곡식 창고 이야기가 매번 같은 순서로 올라왔다. 조조는 그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을 거두고 돌아선 길이라 보고는 얇았다. 얇은 보고를 읽는 일은 두꺼운 보고를 읽는 일보다 오래 걸렸다. 조조는 빈 데마다 붓을 멈췄다.

막사 안에는 화로가 하나뿐이었고, 그 곁 자리를 진궁이 차지하고 있었다. 진궁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 화로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조조는 그 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게 놓였다. 연주가 뒤집힌 뒤에도 이 자리만은 비지 않았다.

조조“공대, 오장 하나가 도망쳤다는군. 동군 사람이라 하네. 서주에서 칼을 놓았다던가.”

진궁“예, 저도 보고를 보았습니다. 이름은 진구라 했습니다.”

조조“이름까지 외우고 있나. 자네는 늘 그렇군. 나는 숫자만 보이는데.”

진궁“저도 동군 사람이라 그런지 그 이름이 눈에 걸렸습니다. 주공께서 숫자로 보시는 동안 제가 이름으로 읽으면 서로 모자란 데를 메울 수 있겠지요.”

조조는 웃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잔 속 물이 식어 있었다. 마셔도 맛이 없을 줄 알면서 한 모금 넘겼다. 막사 밖에서는 보급 수레가 지나가는지 바퀴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그 이름을 쫓아가 주게. 자네가 맡게. 하후돈에게 맡기면 목이 먼저 올 걸세.”

진궁“목이 오는 것이 군령이 아닙니까.”

조조“군령이지. 내가 쓴 거라 내가 제일 잘 아네. 그래서 자네에게 맡기는 걸세. 자네는 이름으로 읽으니까.”

진궁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 속 숯이 한 번 갈라지며 불똥이 튀었다. 진궁은 소매로 불똥을 막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펴져 있었다. 조조는 그 손을 보고 처음 연주에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진궁“주공,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 오장을 쫓는 것이 군령 때문입니까, 아니면 서주에서 올라오는 소문 때문입니까.”

조조“…둘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진궁“다르다고 봅니다. 군령 때문이라면 하후 장군을 보내시면 됩니다.”

II · 불 앞의 간언

진궁은 그날 밤 늦게까지 막사에 남았다. 어깨 위로 겨울 한기가 내려앉았으나 그는 외투를 여미지 않았다. 조조의 눈에는 그것이 일부러 추위를 견디는 사람의 자세로 보였다. 하후돈이 다녀가고 순욱의 서신이 한 통 더 들어왔지만 둘은 그것을 열지 않았다. 서신은 탁자 모서리에 놓인 채 바람이 불 때마다 봉인 쪽이 들썩였다. 조조는 그것이 자꾸 시선에 걸렸으나 손을 대지 않았다. 화로 불이 낮아졌다. 숯 바구니는 둘 사이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진궁“주공, 제가 연주를 떠나지 않은 까닭을 아십니까.”

조조“묻지 않았네. 자네 입에서 나올 말이 뻔해서.”

진궁“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주공께서 군령을 세우시는 일에 반대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서주를 한 번 더 치신다면 저는 그 군령에 이름을 적지 않겠습니다.”

조조“적지 않는다니. 그럼 그 붓은 뭣하러 들고 있나.”

진궁“다른 군령은 적겠습니다. 서주 것만은 안 됩니다.”

조조는 탁자를 두 번 쳤다. 두 번이었고, 세 번째는 없었다. 쳐 놓고 나서 손바닥을 펴 탁자 위에 가만히 얹었다. 나무의 결이 손금과 어긋나게 지나갔다. 진궁은 그 소리를 세는 사람이었다. 몇 번을 치는지, 어떤 말 뒤에 치는지를 수년간 곁에서 지켜본 것이다. 조조도 그걸 알았기에 두 번에서 손을 멈췄다.

조조“공대. 도망친 오장을 쫓아가면 자네는 그 사람을 베어야 하네. 베지 않으면 내가 자네를 베어야 하고.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나.”

진궁“둘 다 아닌 쪽이 낫습니다.”

조조“그런 쪽은 없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진궁은 일어나 휘장 가까이 갔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불침번을 서며 졸다가 창대에 이마를 부딪쳤다.

진궁“있습니다. 이름을 불러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대답하는 말에 따라 길이 보일 겁니다. 칼은 그 뒤에 써도 늦지 않습니다.”

조조“대답이 없으면 어쩌겠나.”

진궁“없으면 그때 제가 주공께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없다는 것을요.”

조조는 한참 진궁의 등을 보았다. 그 등 너머로 휘장이 천천히 부풀었다가 꺼졌다. 연주에서 처음 마주 앉던 밤에도 이 사람은 저렇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때는 그 등이 믿음직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믿음이 어디까지 갈지 헤아려 보게 되는 자신이 낯설었다. 휘장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화로의 재를 한 줌 날렸다. 재는 탁자에 앉기도 전에 흩어졌다. 조조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받아 보려다 그만두었다.

조조의 선택

III · 장부를 쥔 손

조조는 명을 내렸다. 글씨는 평소보다 작았고 줄은 곧았다. 진궁은 명을 받아 읽고 접어서 소매에 넣었다. 접는 손이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조조는 서신 한 통을 더 써서 진궁의 말 안장 가방에 넣게 했다. 내용은 하후돈에게 하는 당부였고, 진궁이 돌아올 때까지 열어 보지 말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서신이 봉해지는 동안 막사 안에는 붓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났다.

조조“사흘이네. 사흘 안에 소식이 없으면 하후돈을 보내겠네.”

진궁“사흘이면 충분합니다. 이름 하나를 부르는 데 필요한 시간이니까요.”

조조“부르는 데만 사흘이 걸리지는 않을 텐데.”

진궁“대답을 기다리는 데 걸립니다.”

진궁이 막사를 나서자 하후돈이 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휘장 틈으로, 하후돈이 진궁의 소매께를 한 번 보고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진궁도 말을 걸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를 새벽 안개가 지나갔다.

하후돈“공대. 그자를 만나면 이름은 부르되 칼은 먼저 쓰지 마시오. 내가 이 말을 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진궁“이상하지 않습니다. 장군께서도 이름으로 읽는 분이십니다.”

하후돈“나는 그런 것 모르오. 내 밑에도 동군 놈이 둘 있어서 하는 말이오.”

진궁은 말에 올랐다. 안장 곁의 붓통이 달각 소리를 냈다. 조조는 막사 안에서 그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탁자를 치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조조“허저. 거기 있나.”

허저“예, 주공.”

조조“소는 돌아왔다 했지. 진궁도 돌아오겠지.”

허저“돌아옵니다. 소처럼은 아니겠지만요.”

조조는 그 말에 웃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막사 밖에서는 말 울음소리가 한 번 났고, 곧 발굽 소리가 서주 쪽으로 멀어졌다. 조조는 소리가 끊긴 뒤에도 한참 휘장을 보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오장의 이름이 적힌 줄을 붓으로 지운다. 번진 먹이 마르는 동안 하후돈은 다른 오장들이 따라 할까 걱정하고, 막사에는 처음으로 온기가 돈다.

III · 지워진 이름

조조는 장부를 펴 그 오장의 이름이 적힌 줄을 한참 보았다.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고, 다시 들었다. 먹이 붓끝에서 한 방울 장부에 떨어졌다. 진궁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조조“지우면 이 사람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나.”

진궁“아닙니다. 장부에서 줄 하나 빠질 뿐입니다.”

조조“그럼 지우는 일이 무슨 소용이겠나.”

진궁“쫓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쫓는 사람이 없어지면 쫓기던 사람이 숨을 쉬겠지요.”

조조는 붓으로 그 줄을 지웠다. 지워진 자리에 먹이 번졌다. 번진 먹은 마르는 데 시간이 걸렸고, 둘은 그것이 마를 때까지 서 있었다.

하후돈“주공. 군령이 한 줄 비어 보입니다. 병영에서 이 일을 알면 다른 오장들도 따라 할 겁니다.”

조조“따라 하는 자가 나오면 그때 보세. 지금은 한 줄뿐이니.”

하후돈“한 줄이 열 줄이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조조“열 줄이 되면 그때 내가 열 줄을 쓰겠네.”

하후돈은 입을 닫았다. 닫기 전에 진궁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진궁은 눈을 내리깔았고, 입가에 웃음 같은 것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진궁“주공, 오늘은 숯을 더 얹어도 되겠습니까.”

조조“얹게. 오늘은 얹어도 되네.”

조조는 지워진 줄 위에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먹이 아직 덜 말라 손바닥에 얇게 묻어났다. 그는 그 얼룩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진궁이 화로에 숯을 넣었다. 불이 올라왔다. 막사 안이 처음으로 따뜻해졌다. 조조는 손을 내밀어 불 가까이 가져갔고, 손가락이 펴지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도 놀랐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지 막사 천 위로 가벼운 소리가 났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오장을 쫓으라는 명을 내리고 진궁을 서주 쪽으로 보낸다. 사흘 안에 소식이 없으면 하후돈이 간다. 진궁은 이름 하나를 부르러 간다고 한다.

시점 2 / 3유비소패 주둔

IV · 마지막 부탁

사수 얘기는 소패까지 올라왔다. 유비는 그 얘기를 끝까지 듣는 일과 듣지 않는 일을 번갈아 하며 한 달을 보냈다.

조조군 오장 몇이 매를 맞았다는 소문도 함께 왔다. 유비는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만,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름을 기억하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

약탈과 불 얘기가 소문의 반을 채웠다. 칼을 거두었다는 사람이 불을 막지 못한 까닭을 유비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조조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은 짧았고, 그 짧은 소식 뒤에 긴 침묵이 따랐다. 유비는 침묵이 길수록 더 조심스러워졌다.

평원성을 나서던 새벽을 유비는 여전히 기억했다. 빌려 쓴 군사의 값이 날마다 불어나는 느낌이었다.

평원성 문을 늦게 나선 날의 그 지체를 유비는 아직도 갚지 못했다. 서주 사람들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입에 올리지 않는 얼굴들이 더 무거웠다.

도겸은 이틀째 같은 말을 했다. 어제 한 말을 잊고 오늘 다시 말했고, 그 말은 어제와 조금씩 달랐다. 유비는 그 달라짐을 듣는 일이 괴로우면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말이 달라질수록 병자의 마음이 어디에 머무는지 보였기 때문이다. 어제는 아들 이야기가 많았고 오늘은 성문 이야기가 많았다.

도겸“현덕, 오늘은 정신이 맑소. 맑을 때 말해 두어야 하오. 내 유언이 될지도 모르니.”

유비“어르신, 아직 그런 말씀은…”

도겸“아직이라는 말은 나한테는 없소. 들으시오. 서주를 맡길 사람은 정해 두었소. 미축이 알고 진등이 아오. 내가 다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말할 것이오.”

도겸“지난봄 내가 한 말, 기억하시오. 그때는 반쯤 농이었으나 이제는 전부 진담이오.”

도겸“성문을 닫아걸라고 했던 일이 마음에 걸리오. 그 문 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나는 끝내 듣지 못했소.”

유비는 이불 가장자리를 바로 폈다. 손에 닿는 천이 거칠었다. 도겸의 손이 유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 손은 가벼웠으나 놓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침상 곁 약탕에서는 김이 가늘게 올라 창호지 쪽으로 번져 갔다.

도겸“또 하나. 조조가 사람을 보낼 거요. 그자 쪽에서 오는 사람은 한 가지를 요구할 거요. 도망친 병사를 내놓으라고. 그 병사가 이 근방에 있다는 소문이 있소.”

유비“어르신께서도 들으셨습니까.”

도겸“듣는 건 병자가 제일 잘하오. 누워 있으면 소리만 남으니까.”

미축이 문밖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와 몸을 숙였다. 손에는 아직 문밖 바람의 찬 기운이 묻어 있었다.

미축“주공. 조조 쪽에서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진궁이라는 분이라 합니다.”

도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유비를 보는 눈이 맑았다. 병자의 눈은 흐릴 때가 많았으나 지금은 한 번도 흐려지지 않은 사람의 눈처럼 보였다. 유비는 그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기가 어려워 시선을 약탕으로 돌렸다.

도겸“공대로군. 사람 좋은 이가 왔소. 좋은 사람 오는 건 드문 일이오. 앉으시오, 앉아.”

V · 사자의 요구

진궁은 성 안채 앞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칼은 문 앞에 맡기고 왔다. 유비를 보자 두 손을 모아 깊이 절했다. 허리를 펴는 데도 서두르지 않았다.

진궁“현덕공. 연주목 조 공의 명으로 왔습니다. 먼저 도 공의 병환을 문안드립니다.”

유비“고맙소, 공대. 이 먼 길에 칼도 없이 오셨구려.”

진궁“칼이 있으면 말이 짧아지기 쉽습니다. 오늘은 말을 길게 하러 왔습니다.”

유비는 진궁을 자리에 앉히고 차를 내렸다. 찻잔을 건네는 손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진궁은 두 손으로 잔을 받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무릎 곁에 내려놓았다. 관우와 장비가 문밖에서 기다렸으나 들어오지 않았다. 장비의 숨소리가 문틈으로 들렸다.

진궁“오늘 온 일은 한 가지입니다. 조 공의 군에서 오장 하나가 달아났습니다. 이름은 진구, 동군 사람입니다. 서주 동쪽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유비“소문이라 하셨소. 소문은 사실이 아닐 수 있소.”

진궁“그렇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실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 현덕공께서는 그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유비의 찻잔이 입 앞에서 멈췄다. 우물가에서 신 끈을 고쳐 매 주던 손이 떠올랐다. 낯선 얼굴과 낯익은 발이 겹쳤다. 유비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유비“공대, 나는 서주에서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모두 알지는 못하오.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날이 많았소.”

진궁“그렇다면 만나셨을 수는 있겠군요.”

유비“만났다 해도 이름은 모르오.”

진궁“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인도하라고 청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알게 되신다면 조 공께서 기다리신다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베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러 보자는 것입니다.”

유비“불러 본다는 것이 칼을 쓰기 전의 일이라면 좋겠소.”

진궁“칼은 제가 먼저 놓고 왔습니다. 그 점은 믿어 주십시오.”

장지 너머에서 약탕 끓는 소리가 가늘게 났다. 그 소리 때문에 방 안의 말들이 한 겹 낮아졌다. 유비는 진궁이 자기 입에서 나올 한마디를 오래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진궁의 눈은 정직했다. 유비는 그 정직함이 이 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비의 선택

VI · 닫지 않은 문

유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유비 자신도 가려내지 못했다. 진궁은 더 묻지 않았고, 찻잔을 조용히 비웠다.

진궁“알겠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조 공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유비“그대로 전해 주시오.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고.”

진궁“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다만 현덕공,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서주에서 오래 숨어 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겨울에는 숨을 데도 먹을 데도 마을밖에 없습니다.”

유비“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소.”

진궁“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가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진궁은 일어나 다시 절했다. 유비는 문까지 배웅했다. 장비가 문밖에서 진궁을 노려보다가 관우의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 관우는 문을 반쯤만 닫은 채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소패 성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병사들이 문 옆에 모여 있다가 유비가 지나가면 뿔뿔이 흩어졌다. 유비는 일부러 그들을 부르지 않고 지나쳤다. 부르면 대답해야 하고, 대답하면 거짓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관우“형님. 저 사자가 서주 동쪽으로 간다 합니다. 사수 쪽입니다.”

유비“길을 막지 마라, 운장. 막으면 오히려 그가 그리로 간다.”

관우“그럼 그자는 어찌 됩니까.”

유비“…그자의 몫이 되었구나. 이제부터는.”

유비는 해 지는 성문 밖을 한참 보았다. 말발굽이 먼지를 낮게 깔며 멀어졌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유비는 문 안에 서 있었다. 성문 위 성가퀴에서는 보초가 창을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유비는 그 소리가 어쩐지 위로처럼 들려 옷깃을 여몄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지키지도 막지도 않겠다며 문을 열어 두겠다고 한다. 진궁은 신 끈 매듭을 수놓은 천 조각을 탁자에 두고, 그 천은 저녁이 깊도록 그대로 놓인다.

VI · 열어 둔 길

유비는 한참 찻잔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앞뜰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비“공대.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소. 서주 동쪽 마을에 호구를 조사하러 서리를 보냈소. 그 장부에 이름이 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진궁“장부에 이름이 오르면 찾을 수 있겠군요.”

유비“찾는 쪽이 아니라 찾아가는 쪽이 될 수도 있소. 스스로 이름을 대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오.”

진궁은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을 한동안 보았다. 김은 가늘게 오르다 천장 근처에서 흩어졌다.

진궁“현덕공은 그 사람이 스스로 걸어 나오기를 바라시는군요.”

유비“바라는 건 아니오. 기다릴 뿐이오. 문은 열어 두겠소.”

진궁“지키지는 않으시고요.”

유비“지킬 힘이 내게는 아직 없소. 그러나 막을 마음도 없소.”

진궁은 소매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신 끈 매듭을 수놓은 것이었다. 연주 군영에서 쓰는 매듭이었다.

진궁“그 사람이 이 매듭을 알아보면 제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나게 되시면 전해 주십시오.”

유비“전하는 일까지는 약속하지 못하오.”

진궁“약속은 필요 없습니다. 놓아 두기만 하십시오.”

장지 밖에서는 장비가 오래 서성이다 발걸음을 멈췄다.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의 숨소리가 문틈으로 한동안 이어졌다. 유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르지 않았다.

유비는 천 조각을 소매에 넣지 않았다. 진궁도 가져가라고 하지 않았다. 천은 탁자 위에 놓인 채 저녁이 깊어졌다. 유비는 등불을 하나 더 켜게 했다. 불빛이 매듭 수의 올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실이 고르게 반짝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진궁에게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답한다. 진궁은 그대로 전하겠다며 물러나고, 관우는 문을 반쯤만 닫은 채 서 있다. 사자는 사수 쪽으로 향한다.

시점 3 / 3진구탈영병

VII · 갈대밭의 밤

서주 동쪽 마을을 떠나 사수 가까이 닿은 것은 열흘 뒤였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지나치는 행인으로만 보았고, 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구는 아이를 마을에 두고 왔다. 정확히는 할멈이 아이를 붙잡아 앉혔다. 그래서 지금 갈대밭에는 진구 혼자였고, 혼자인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불편했다.

열흘 동안 진구는 낮에는 숨고 밤에 걸었다. 길가 주막 불빛이 보이면 돌아서 갔고, 개 짖는 소리가 나면 돌아서 앉았다. 군에 있을 때는 그런 소리쯤 흘려들었는데 이제는 하나하나가 이쪽을 향한 소리처럼 들렸다.

사수는 강폭이 넓지 않았다. 마른 갈대가 물가에 빽빽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진구는 갈대 사이에 몸을 눕혔다. 눕자 하늘이 보였다. 별이 몇 개 있었는데 하나도 선명하지 않았다.

열흘 전 마을을 나올 때 할멈은 아무 말 없이 빈 베 자루에 떡 몇 덩이를 싸 주었다. 아이는 담장 위에서 따라 나오지 못한 채 손만 흔들었다. 진구는 돌아보지 않았는데 등 뒤 담장 기와 위에 아이가 서 있는 느낌이 며칠이고 따라왔다.

그는 누워서 귀를 기울였다. 베옷 아래로 마른 갈대 줄기가 등을 찔렀지만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물소리가 들렸다. 흐르는 소리였다. 한 달 전만 해도 들리지 않던 소리가 갈대밭에서는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막았던 강이 이제 다시 흐르고 있었다.

진구“…흐르는구나.”

혼잣말이었다. 진구는 놀랐다.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 않아서였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꺾어 보았다. 딱, 소리가 났다. 소리는 갈대 사이로 번져 갔다.

그때 둑 위에서 발소리가 났다.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말은 두고 왔는지 말발굽 소리는 없었다. 발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숨기지는 않았다. 갈대가 갈라지는 소리로 보아 일부러 소리를 내며 오는 것이었다.

진궁“거기 계십니까.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칼은 없습니다.”

진구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일으키면 보이고, 보이면 끝이었다. 손가락이 갈대 줄기를 쥐었다. 줄기가 가늘게 떨렸다.

진궁“진구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동군 사람입니다. 오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름이 불렸다. 갈대밭 한가운데서 이름이 불리자 진구의 가슴이 차게 식었다. 이름이 이렇게 큰 소리였다는 것을 진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이름을 대라는 서리 앞에서 말이 걸렸고, 지금은 누가 이름을 부르는데 대답이 걸리고 있었다. 입술이 마르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진궁“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 앉아 있겠습니다. 날이 샐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발소리가 멈췄다. 사람이 둑에 앉는 소리가 났다. 진구는 갈대 사이로 고개를 반쯤 들어 둑 위를 보았다. 문관 차림의 사람이 홀로 앉아 있었다. 허리춤에 칼이 없었다. 진구는 그것을 한참 보았다. 군에서는 칼 없는 허리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얇은 허리띠가 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가 다시 몸에 붙었다.

VIII · 불러 보는 이름

진구는 갈대에 기대 앉으며 왜 이곳까지 왔는지를 스스로 물었다. 사수를 한 번 보려 했다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강이 흐르는지, 아직도 막혀 있는지, 흐른다면 어떤 소리인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도록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달이 오르자 둑 위에 앉은 진궁의 그림자가 갈대밭 쪽으로 길게 드리워졌고, 그 끝이 진구의 발치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진구는 그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거두었다. 갈대 소리와 물소리만 번갈아 났다.

진궁“저는 진궁이라 합니다. 조 공의 곁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진구는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장부에 적힌 이름, 군령 문서 맨 끝에 붓으로 쓴 이름이었다.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었다.

진구“…칼이 없다더니 정말 없군요.”

진궁“예, 두고 왔습니다. 있으면 제가 먼저 쓸까 봐서요.”

진구“쓰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진궁“없습니다. 그래도 손에 들려 있으면 모를 일이라서요.”

진구는 갈대 사이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서자 베옷 자락에 마른 갈대잎이 달라붙었다. 진궁은 일어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진궁의 눈은 놀라지도 겁내지도 않았다. 오래 기다린 사람의 눈이었다.

진구“저를 데려가시려고 오셨습니까.”

진궁“데려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 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진구“무슨 대답입니까.”

진궁“서주에서 칼을 놓으신 이유입니다. 군령에는 쓰여 있지 않으니까요.”

진구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한마디에 담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군령이었고, 다음에는 아이였고, 그다음에는 손에 남은 감촉이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이유인지 스스로도 갈라내지 못했다. 아버님을 위한 일이었다는 말이 입속에서 굴렀다. 지금까지 입이 닳도록 외운 말인데 이 밤에는 외우기가 힘들었다.

진궁“한마디로 안 되면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날이 샐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진구는 물소리를 들었다. 한참 듣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말이 나오는 순간 목구멍 안쪽이 시큰했다. 오래 막혀 있던 우물에 첫 두레박이 닿는 것 같았다.

진구“…세다가 그만뒀습니다. 사람을요.”

진구의 선택

IX · 날이 샐 때까지

진구는 이름을 말했다. 진구라고 했다. 동군, 스물여덟, 오장이라고 했다. 말하는 동안 목소리는 떨렸으나 끊기지 않았다. 진궁은 한 번도 말을 자르지 않았다.

진구“서주에서 칼을 놓은 것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놓지 않으면 다음 집 문도 제가 열 것 같아서였습니다.”

진궁“놓으신 뒤에는 어떠하셨습니까.”

진구“놓고 나서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밥맛이 없고 잠이 안 오고, 물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진궁“지금은 들리십니까.”

진구“…오늘 밤에 처음 들렸습니다.”

진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둑에서 일어나 소매의 먼지를 털었다. 일어서자 새벽 어스름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진궁“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조 공 앞에서 지금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해 주십시오. 그 이상은 약속드리지 못합니다.”

진구“베어지면 어쩝니까.”

진궁“베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저도 그 자리에 서 있겠습니다.”

진구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 갈대가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진구“아이가 마을에 있습니다. 할멈이 보살피고 있고요. 제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진궁“오래 기다리시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둑 위에 올라서자 진궁의 말이 풀을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 진구를 한 번 보더니 다시 풀로 돌아갔다. 말의 눈에는 베옷도 군복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진구는 그 무심함이 이상하게 고마웠다.

둘은 둑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진구는 걸으면서 손가락을 한 번 더 꺾었다. 딱, 소리가 새벽 안개 속으로 번졌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말없이 갈대밭 깊이 걸어 들어간다. 진궁은 날이 샐 때까지 둑에 앉아 있다가 갈대밭을 향해 절하고 서쪽으로 떠난다.

IX · 숨은 자의 몫

진구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갈대밭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른 줄기가 어깨를 스치며 소리를 냈다. 소리는 진궁의 귀에도 닿았을 것이다.

진궁“잠시만요. 가시기 전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진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돌아서게 되고, 돌아서면 말하게 될 것 같았다.

진궁“저는 날이 샐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날이 새면 가겠지만, 가기 전에 이 말만은 남기겠습니다.”

갈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진궁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높지 않고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진궁“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밤 제가 불렀고, 당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진구는 그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계속 걸었다. 발밑의 흙이 물렁했다. 한 걸음마다 신발이 푹푹 빠졌다. 짚신 끈이 앞에서 한 번 감기고 뒤에서 두 번 꼬여 있었다. 그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갈대밭 깊은 곳에서 진구는 한참 더 걸었다. 물이 얕아지는 자리까지 가서야 발을 멈췄다. 거기서 둑 쪽을 돌아보자 진궁의 그림자는 작아져 어둠에 섞여 있었다. 진구는 숨을 오래 내쉬었다.

진궁은 날이 샐 때까지 둑에 앉아 있었다. 말한 대로였다. 아침 해가 물 위에 닿자 그는 일어났고, 갈대밭을 향해 한 번 절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진궁“…돌아오지 않으시는군요.”

혼잣말이었다. 진궁은 말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안장 곁의 붓통이 달각 소리를 냈다. 갈대밭 깊은 곳에서 진구는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진궁에게 이름과 이유를 모두 말한다. 베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도 새벽 둑을 올라 진궁과 나란히 걷는다. 걸으며 손가락을 한 번 더 꺾는다.